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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르조 Jan 16. 2023

세 번의 결혼식

230108

주말에 세 개의 결혼식을 다녀왔다.


지금은 마지막 결혼식을 마치고 기차에 올랐다. 시간은 9시 31분. 창 밖에 보이는 풍경이 온통 시커멓다. 기차가 점점 느려지다 멈췄다. 김천구미역이다. 열차에는 아이가 한 명 탔는데, 기적적으로 조용하다. 누구도 말을 하지 않는다. 기차가 다시 움직이며 만들어내는 소음만 들린다. 글 쓰기 딱 좋은 환경이다. 




Y는 내가 아는 친구 중 가장 선하다. 상대가 누가 되었든 최선을 다하는 친구다. 내게 타인을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대하는 친구가 있다면 그건 Y일테다. 그런 그는 연애를 꽤 오랫동안 하지 않았다. 짝사랑은 몇 번 했더랬다. 사람에 대한 기대를 접고 살아가던 어느 평범한 날 Y의 친구가 본인이 아는 사람을 Y에게 소개했다. Y는 한사코 거부했지만 친구는 막무가내였다. 음악 취향부터 성격까지 많은 부분이 맞을 것 같아서였단다.

그 사람을 소개받고 만나기 전에 함께 잠실을 잠시 걸었던 게 기억난다. Y는 불편한 기색이었다. 마음을 닫고 살고 있었는데 친구가 억지로 열어젖힌 모양새였다. 그래도 친구가 그렇게 성화이니 한 번은 만나보겠다는 스탠스였다. 좋은 기회다 싶었다. 나를 포함한 Y의 친구들은 오랫동안 Y가 사랑하고, Y를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으면 했다.

그들은 결국 만났고, 함께 서른이 된 첫 주말 토요일 아침에 결혼했다. 행진을 앞두고 서있는 Y와 눈이 마주쳤다. 꼭 10년 전에 처음 봤을 때처럼 Y는 웃고 있었다. 약간은 힘이 빠진, 어떤 악의도 없는 편안한 웃음이었다. 살면서 어떤 순간을 경험했을 때 “아 이 순간은 꽤 오랫동안 기억나겠구나.”할 때가 있다. 식을 시작하기 전 Y의 웃음이 그랬다. 한 자리를 오랫동안 지키는 나무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긴 겨울이 있었다. 부모님의 불화, 유전성 질환, 자기와 같지 않은 상대방의 마음 같은 것들이 그를 삶에서 괴롭혔다. 그러던 어느 날 가지에서 잎사귀가 파릇파릇 생겨나더니 이제는 시간이 흘러 연분홍 꽃이 피려하고 있었다. 결혼식에서 누군가에게 이렇게 진심으로 안녕을 빌었던 적이 있었던가. 그의 앞날에 어떠한 어둠도 서리지 않기를 바랐다.

Y는 가장 Y스럽게 행진했다. 차분하고 편안하게 단상을 향해 걸어갔다. 이윽고 신부가 등장했다. 전반적으로 고전적이고 편안한 느낌을 자아내는 예식이었다. Y의 부모님의 결혼식 때 축가를 하셨던 분이 악기를 다루는 본인의 자녀들과 함께 Y의 축가를 준비했다. 가장 인상 깊었던 건 신부 친구의 축사였다. 중학교 때부터 삶의 여정을 함께해 온 단짝친구였다. 울먹임을 참으며 준비한 본인의 말을 한마디 한 마디 읽어내려가는 친구의 꾸밈없는 말에는 진심만이 자아낼 수 있는 힘이 있었다. 오늘 결혼하는 건 Y와 신부이지만, 신부와 친구도 이날을 함께 평생 잊지 못할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어떤 진정성은 완전히 무결해서 보는 사람을 압도해버리기도 한다.

양가 부모님과 하객에게 인사를 마친 신랑 신부는 함께 걸었다. 단정하고 따뜻한 행진이었다. 힘든 날도 저 둘 앞에서는 두 손 두 발 다 들고 도망갈 것 같았다. 서로의 사랑 안에서 각자의 꽃이 마음껏 피어날 수 있기를 기도했다.




A의 결혼식은 오늘 1시 반이었다. 주말에 참가하는 마지막 예식은 조금 멀리서 3시 반이라, 오래 있지 못하는 만큼 일찍 A의 식장을 찾았다. A답게 화려한 식장이었다. 막상 그를 보고 대화한 시간은 1분 남짓이었다.  그것도 사진을 남기기 위해서였다. 사람이 정말 많았고 그마저도 식장에서 촬영하는 단독 사진 일정으로 인해 시간이 얼마 주어지지 않았다. 축하한다는 말을 남기고 나오는데 그 사람과 눈이 잠깐 마주쳤다.

그 사람과 마주치는 일이 자주 있지는 않다. 하지만 가끔씩 이렇게 눈을 마주할 때면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서로가 서로를 봤던 그 짧은 순간만 기억이 난다. 내가 어떤 말과 행동을 했는지 도무지 생각나지 않는다. 사고가 정지되는 느낌이다. 누군가에게 끌리는 일이 내겐 일상적인가 싶기도 하다. 하지만 이 사람은 뭔가 다르다. 그냥 직관적으로 나에게 맞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면서 나는 이 사람과 함께 여기서 예식을 올리는 상상을 해본다. 아마도 말이 되지 않는 일이다. 조심해야 한다. 올해는 누군가를 만나더라도 더욱 신중해야 한다.

A는 사진 촬영도 참 열심히 했다. 뭐든지 열심히 하는 친구다. 예전엔 나와 가장 다른 결의 사람이라는 생각을 했다. 가장 멀리해야 할 사람 같기도 했다. 이제는 A의 삶도 조금은 이해가 될 것만 같다. 사회에서 보낸 시간 덕분이다. 그가 내뱉는 날카로운 말들이 더 이상 특징적이지 않다. 내가 굳이 축하하지 않더라도 알아서 잘 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대충 식사를 하고 택시를 타고 기차역으로 향했다. 낮잠도 좀 자고 키신저의 <세계 질서>를 조금 읽었더니 벌써 동대구역이었다. 친구들이 축가를 부를 때쯤 도착했다. H도 신부 곁을 잠시 떠나 친구들과 함께 신부를 향해 <오르막길>을 불렀다. 참 좋은 노래인데, 감정이 동하진 않았다. 일본에서 오래간만에 건너온 친구와 몇 달 전 동생을 하늘나라로 보낸 친구도 왔었다. 중학교 친구들이다. 꽤 오랫동안 잘 안 보고 지냈는데 몇 년 전부터 다시 연락이 닿았다. 한 때 같이 많은 시간을 보내곤 했었는데 M과 사이가 소원해지면서 자연스럽게 멀어졌다.

식이 끝나고 함께 저녁을 먹으면서 정말 오랜만에 본 친구들과도 인사를 나누고 옛날 얘기도 했다. 애들 근황도 듣고 시답잖은 농담도 하고 다시 중학생으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친구들은 결국 같은 시간을 공유한 사람들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편안했고 행복했다. 내 안에 "대구"라는 정체성도 앞으로 무시하고 살 수는 없겠구나 싶었다. 대구까지 결혼식을 내려온 것도 그 직감 때문이었다. 잠시 멀어졌지만 내게는 소중한 사람들이다.

식사를 마치고 나가며 친구들과 함께 H에게 인사했다. 모든 순서가 끝나고 이제 허니문만 남은 그는 긴장이 꽤 풀린 듯했다. 안도감이 느껴졌다. 한 놈 더 가는구나. H의 아내 뱃속에는 아이도 이미 있었다. 몇 개월 뒤의 그의 삶은 여태까지와 완전히 달라지겠지. H의 표정에는 그 모든 걸 받아들인다는, 아직은 조금 흐물거리는 결단이 있었다.


M, M의 아내와 함께 JH의 차에 탔다. 지산 청구 아파트, 협화, 동아백화점을 이 친구들과 함께 다시 지나가는데 감회가 새로웠다. 시간이 흘렀다. 우리는 커졌다. 동네는 한없이 작아 보였다. M은 딸이 아직도 본가에서 자고 있다고 한껏 들떠서 아내와 함께 영화관으로 갔다. 아바타2를 보기 위해서였다. 이제쯤 끝났겠네. 기차 내리면서 연락해야겠다.

JH와 함께 집으로 향했다. 동생을 먼저 떠난 보낸 JH를 엄마가 꼭 챙겨주고 싶어했다. 그래서 어쩌다 보니 JH, 부모님과 함께 대구 집에서 케이크에 초를 붙이고 생일 축하 노래를 듣고 있었다. 며칠 뒤는 내 생일이다. JH는 자신의 연애, 결혼, 나와의 관계, 우리 부모님을 찾아뵙고 싶었던 마음, 자신의 직장에 대해서 차분하게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기승전결이 확실한 이야기였다. 타고난 스토리텔러가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고난 투성이인 삶이었는데 JH도 참 반듯하게 컸다 싶었다.

이제 곧 기차가 수서역에 도착한다. 이번 주말은 세 번의 결혼식으로 요약할 수 있겠다. 친구들을 많이 만났다. 중학교 시절부터 현재까지 나의 삶과 내 곁에 있는 사람들을 자연스럽게 돌이켜보게 되었다. 연락이 닿지 않았던 친구들에게도 편안하게 대하는 나 자신을 보면서 사회생활 짬도 많이 먹었구나 싶었다. 이렇게 하루가 또 쌓여서 어른이 되는구나. 이제 곧 만 나이로 서른이다. 그게 이젠 싫지 않다. 어쩌면 서른이 될 준비를 마쳤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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