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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르조 Feb 27. 2023

낭만적 사랑이 우릴 구원할까

230227

호감을 가지고 있던 사람에게 남자친구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사실 그리 놀라운 소식은 아니었다. 그토록 괜찮은 사람에게 사귀는 사람에게 없다는 게 오히려 이상한 걸지도 모른다. 그래도 마음이 심란한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다만 예상만큼 심란함이 나를 흔들지 않는다는 점은 의외였다. 그 사람에 대한 내 마음이 그다지 크지 않아서일까, 세월이 쌓이면서 누군가를 향한 마음을 꼭 돌려받지 못한 것에 익숙해져서일까?


첫사랑 이후 연인 간의 사랑, 즉 낭만적 사랑은 내 사랑의 총량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지속적으로 낮아져 왔다. 사랑이라는 감정을 처음 느꼈을 때는 감정에 압도당한다. 누구나 그랬을 것이다. 그 사람이 나의 세계였다. 세계가 허물어지면서 느끼는 고통은 다시 반복하고 싶은 것이 아니었기에 조금씩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서, 인지하지도 못한 채 낭만적 사랑은 점점 내게 빛을 잃어갔다.


지금 내게는 친구들이 가장 소중하다. 나라는 사람을 가장 잘 알고 나에게 영감의 원천이 되는 친구들 말이다. 연애만 하면 친구들에게 거의 사라진다 싶을 정도로 애들에게 신경을 못 쓰곤 했는데 그런 것도 친구들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그러다 내가 다시 관계에서 나오면 어깨를 두들겨주고 기꺼이 자신의 시간을, 생명의 파편을 내어준다. 잔뜩 경직되어 있던 내가 입만 열면 헛소리를 할 수 있게 된 것도, 가장 조그만 것에도 웃을 수 있게 된 것도 친구들 덕분이다. 삶이 허무하고 가끔씩은 다 내려놓고 싶을 때도 한 놈 한 놈의 얼굴을 생각하면 그럴 수가 없다. 친구들은 내게 영원한 따뜻함이다.


적지 않은 관계를 거쳐 연애 자체에 대한 회의감이 쌓여온 지금, '과연 내게 낭만적 사랑이 꼭 필요한가?'라는 질문을 스스로 하게 된다. 그것도 꽤 자주 말이다. 관성적으로 소개팅을 하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게 정말 내가 원하는 것에 도달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거쳐야 하는 과정인 걸까? 젊을 때 많이 만나보라는 말은 한창 시절을 떠나보낸 사람들이 아무 생각 없이 하는 말 같은 것 아닌가. 나와 전혀 맥락이 없는 사람을 만나고, 알아가고, 서로에게 의미가 되어 마침내 구원에 이를 수도 있다는 가능성이 점점 내게 현실성을 잃어가고 있다. 그래서 결혼한 친구들, 동료들을 보면 신기하다. 매번 물어본다. 어떻게 결혼을 결정하게 되었는지 말이다. 매번 돌아오는 답은 신통치 않다. 회사에도 결혼하지 않고 주말마다 결혼하지 않은 친구들끼리 놀러 다니는 선배들도 있다. 예전에는 내게 선택지로 고려조차 되지 않았는데 점차 대안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냥 던지는 말이 아니라 진지하게 말이다.


한 사람을 만나 그 사람이 내 세계가 되고, 내가 그 사람의 세계가 되었던 기억을 잊은 게 아니다. 난생 처음 느껴보는 충만함을, 속절없이 견뎌내는 것밖에 없었던 인생이 마침내 구원에 이르는 감각을 아주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 시간은 모든 것을 변하게 만든다던가. 내게 낭만적인 사랑의 원형은 이끼가 가득해 형체만 가까스로 알아볼 수 있는 석상 같다.


견뎌낸 시간만큼 스스로를 사랑할 수 있다고 믿는다. 나는 이순신처럼 나라를 구하지도, 스파이더맨처럼 뉴욕을 구하지도 않았지만 내게 주어진 시련을 나름대로 극복하면서 나만의 드라마를 써왔다. 타인과의 관계도 중요하지만 자기와의 관계는 필수불가결하다. 예전에는 거울을 보면서 스스로와 대화한다는 것 자체가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이제는 주기적으로 한다. 혼잣말도 한다. 혼자 피식 웃기도 하고 노을 지는 한강 같은 걸 보기라도 하면 입이 옆으로 찢어질 때까지 환하게 웃는다. 배에 힘을 주고 크게 "호우"라고 외쳐보기도 한다.


나이 드는 게 좋다. 스스로가 대견하다. 나를 있게 해준 가족, 친구, 지난 사랑들이 고맙다. 후회되는 게 없다. 사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무엇하나 버릴 것 없었다. 앞으로도 이렇게 살아가면 된다. 친구들과 웃고 떠들다 보면, 혼자 거울 보고 씨익 웃다가 보면 어느 날 인연이 찾아올지도, 영 안 올지도 모른다. 그럼 그대로 살아가면 된다. 순간순간 내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말하고 행동하면서 말이다. 


수많은 우연이 쌓여 우리가 만날 수 있다면 그것은 아름다운 일.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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