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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르조 Jul 12. 2024

친한 회사 선배

240711

친하게 지내는 회사 선배가 있다.    

 

처음부터 잘 맞았던 건 아니다. 나는 선배가 포용력이 있는 큰 형 같은 느낌이라 좋아했는데, 선배는 항상 에너지가 넘치는 내가 부담스러웠단다. 눈빛이 이글거리고 항상 얼굴이 빨갰대나. 다른 회사 사람들이 내 인상에 대해 주로 주는 피드백도 “자유로운 영혼”, “진취적”, “창의적인”과 같은 키워드였다. 보수적이고 정적인 회사에서 좋든 싫든 눈에 띄는 성격이었나 보다.     


내가 남들의 눈에 자유분방하게 비쳤던 건, 원채 남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으려고 하는 점도 있지만 이렇게까지 회사를 오래 다니게 될 줄 몰랐다는 점도 크다. 한국에서 하는 조직생활은 맞지 않을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 여길 거쳐 또 다른 하고 싶은 걸 찾아 떠나겠지, 싶었다. 여지껏 살아오면서 쭉 그래왔으니까.     


지금 재직 중인 회사를 다니면서 다른 진로도 찾아보고 면접도 봤지만, 내리게 된 결론은 지금 내가 있는 회사가 내게 최적이라는 것이었다. 돌이켜 보면 그때부터 내가 하는 일을 조금 더 진지하게 대하고 주변 사람들에게도 더 온화하고 진중하게 대하려 했던 것 같다. 30대가 되면서 자연스럽게 나이를 먹은 것도 있겠고.     


어쨌든 조금 더 차분해진 버전의 나와 선배는 곧잘 어울렸다. 점심도 먹고 가끔 답답할 때 나와서 산책도 하고 주말에 등산도 다녀왔다. 이번 주만 해도 저녁도 먹고 오늘은 점심도 같이 먹었다. 선배랑 같이 있으면 편안하다. 온전히 나로서 존재할 수 있다. 선배도 스스로서 존재하는 듯하다. 같이 대화를 나누다 보면서 드러나는 서로의 차이를 발견하면서 각자를 서로 더 명확하게 인식하게 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가령 이런 식이다. 나는 아이를 낳고자 하는 생각이 없는 편이다. 크게 두 가지 이유인데, 하나는 나를 위한 것이고 하나는 태어나지 않은 아이를 위한 것이다. 나는 하고 싶은 게 많은 사람이다. 이렇게 뭔가를 쓰는 것도 좋아하고 새로운 걸 알아가는 걸 즐기고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면서 느끼는 따뜻함을 소중히 여긴다. 아이가 생기면 기나긴 시간 동안 아이가 나와 상대방의 시간을 다 빨아들인다. 둘이서 보내는 시간도 줄어든다. 부부 간 사이가 소원해지는 경우도 많다.     


사실 위 이유들은 내가 아직 경험해보지 못한 아이를 통해서만 느낄 수 있는 기쁨의 기댓값으로 충분히 상쇄가 가능할 것도 같다. 내게 풀기 어려운 문제는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서 살아갈 아이의 삶이다. 세계에서 가장 빠른 생산인구 감소로 인해 늘어나는 부양 부담, 경쟁적인 사회 분위기, 압제적인 교육 환경, 기후 위기까지. 특히 10대 시절 한국 교육 내에서 신음했던 나는 내가 낳은 자식이 그 고통을 겪는 걸 볼 자신이 없다.     

반면 선배는 가정을 꾸리고 싶어 한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서 아이를 낳고 작년에 산 하얀색 신형 산타페에 가족을 태워 자기가 좋아하는 우리나라의 여행지를 돌아다니는 게 꿈이다. 워낙 혼자 시간을 잘 보내고 사람을 만나는 걸 조심스러워하는 성격이라 한 때는 혼자 살아가는 걸 진지하게 고민했던 것 같다. 그러던 선배가 제작년쯤인가부터 확고하게 결혼을 하고 싶다는 말을 하기 시작했다. 아이는 예전부터 막연하게 혹은 당연하게 있으면 좋겠다고 살아왔다.     


아이에 대한 관점이 다르다는 건 이미 서로 알고 있었다. 왜 그런 생각을 하는 것 같나, 는 선배의 질문에 오늘 따라 다른 사람이 떠올랐다. 최근에 동생과 시간을 많이 보내서 그럴 수도 있겠다. 동생은 고등학교 시절 건강을 이유로 자퇴했다. 몸과 마음이 아파 몇 년 간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날 때부터 몸이 좋지 않은 편이었는데 가정에 불화가 생기면서 마음에 상처를 입은 채로 입시 교육을 맞아야했다. 타인의 시선에 예민하고 신경이 곤두서있어서 친구들과의 관계도 항상 어려워했다. 동생은 내게 늘 아픈 손가락이었다. 함께 자랐지만 부모님께서 동생을 돌볼 여력이 없을 땐 내가 동생의 보호자 역할을 했다. 그러다 보니 조금이나마 부모 역할을 해본 셈이다. 지금은 둘 다 삶을 긍정하며 살아가지만 나와 동생의 힘들었던 시절을 돌이켜보면 아이가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을까하는 질문에, 선뜻 답하기가 어렵다. 여전히 그 시절의 그림자 안에 내가 있구나.     


선배가 오늘 흥미로운 비유를 들었다. 호주 생활할 때 친했던 친구의 이야기다. 그 친구는 주변 사람들이 자신을 험담하면서 사회적으로 고립되는 상황에 처해 있었다. “내가 잘못한 건가?” 스스로를 의심하며 괴로워하던 나날들 끝에서 그 친구는 어느 날 문득 이런 생각을 했단다. 저 사람들의 말을 상기하고 그 사람들의 시선에 맞춰 나를 바라보는 게 마치 깨진 거울 속을 들여다보는 것과 같지 않을까. 나는 왜 깨진 거울 앞에 서서 나를 보고 있는 건가. 그런 생각이 들면서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점차 자유로워지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누구나 살면서 이런 상황에 처하곤 한다. 조직 내 업무 환경에서도 일에 헌신하고 능력에 출중한 사람이 시기와 질투로 인해 고통 받는 건 너무나 흔한 일이다. 조직에 가장 많이 기여하는 사람이, 그만큼 다른 구성원의 업무 부담을 줄여주는 사람이, 그 구성원의 험담의 대상이 된다는 아이러니. 결국 본질은 자신의 길을 우직하게 걸어가는 것에 있음을 기억한다. 아직 자꾸 깨진 거울 앞에 서있는 자신을 발견하는 사람이라면, 부디 스스로를 자신의 눈으로 온전히 바라볼 수 있길. 자신이 만들어낸 맑은 거울 앞에서 우뚝 설 수 있길 바라는 마음이다.     


선배와의 점심은 언제나 너무 짧다. 이틀 만에 봤는데 한 달 만에 본 사람들처럼 수다가 끊이질 않았다. 앞으로도 자주 맛있는 거 사달라고 졸라야겠다. 그리고 다음에 선배를 만나면 꼭 친구를 소개팅해 줄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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