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장은비 Jun 19. 2022

나의 사랑이 선의에 닿기를

사랑이란 이름을 가진 어떤 행위를 할 수 없게 되었을 때


때때로 삶이 내 맘과도 같지 않을 때가 있는데 오늘이 딱 그런 날이다. 연애도 결혼도 하고 싶지만, 섣부르게 시도할 수 없는 나이가 된 것을 느낀다. 나름 글을 주기적으로 쓰고 싶었고, 그나마 생각을 나열하기에 좋은 “사랑이란” 주제로 써보자 다짐했는데 요즘 부쩍 내가 무엇을 쓸 수 있을까를 고민하게 된다. 나는 선택적으로 사랑을 하지 않기로 다짐했다. 현생을 돌봐야 한다는 이유를 표면적으로 내비쳤지만, 세상이 말하는 사랑과 내가 추구하는 사랑의 형태가 무척이나 다르다는 이질감이 들어서였다. 추가적으로, 내가 아무리 상대를 좋아한다고 한들, 상대방 측에서 나를 좋아할 일이 생각보다 꽤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몸으로 체득하기를 20여 년이 걸리고 나니 지쳐버렸다. 더 이상 이런 감정들로 인해 삶이 영향받지 않기를 원하는 마음이 들다 보니, 내가 과연 사랑에 관한 고찰들을 꾸준히 적어 내려 갈 수 있을까를 두려워하게 되었다. 일반적인 형태라 부르는 사랑과 내가 생각하는 사랑의 다른 차이점을 설명할 수 있을까. 이게 다 무슨 소용일까. 내 스스로가 사랑을 하기를 점점 더 포기하게 되는 날들이 도래하고 있음을 몸으로, 마음으로, 실감하고 있는데.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나의 사랑은 무한대로 늘어나 차고 넘치는 행복을 선사할 수 있을 거라 여겼다. 상대방을 좋아하는 일에는 자신 있고, 맞춰가는 일에도 정말 자신 있었다. 안되면 될 때까지 꾸준히 해낼 수 있는 진득함도 가지고 있고, 상대방이 좋아하는 것들을 함께 맞춰가고 싶었다. 그런데, 내가 간과한 것은, 상대가 내게 사랑을 줄 때만 나의 사랑이 무한대로 늘어난다는 것이다. 사랑을 주지 않을 때, 지극히 일방적일 땐 나도 어쩔 수 없는 사람인지라 지쳐버린다. 그러다 보니, 누군가 좋아져도 쉽게 고백하지 못한 채, 그저 좋은 사람으로 남아있기를 택했다. 좋아하지만, 이 관계마저 불편함 때문에 끊어지는 게 싫었다. 그런 감정들이 차곡차곡 쌓여갔다. 공과 사는 구분하는 나이가 되어 속해있는 공동체 내에서 가급적 사랑이란 감정을 만들지 않으려 애쓰게 되었다.(그래도 이안에 있는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지 않을까는 늘 꿈만 꾼다.) 학원 수업 도중 “사랑은 자해”라는 말을 듣고 나는 그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한 친구는 “사랑이라 불리는 감정 소모는 현대사회에서 불필요한 감정에 불과”하다고 했는데, 또 그 말에 수긍하게 되어 선택적으로 사랑하지 않음을 택한 그 친구를 존중하게 된다. 그러다 보니 내가 추구하던 사랑 예찬론자의 삶을 살아가기를 갈구하면서도, 사람이라면 사랑을 반드시 해야 한다는 논지에 대해 할 말이 없다. 내가 봐도 현대사회에서의 사랑은 지극히 마이너스인 측면들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그 모든 게 이해하는 내가 되었을뿐더러, 사랑에 대한 마음과 스킨십에 의한 쾌감을 구분 지을 수 있다. 몸의 끌림과 마음의 끌림이 다르다는 걸 알게 되고, 더 이상 설렘에 동요되지 않으려 애쓰다 보니 이 사랑이란 감정을 어떻게 시작했었는지 기억이 안 난다. 내가 추구하던 그 “사랑”이 도대체 무엇이길래 이토록 지리멸렬하게 갈급한 마음을 가지면서도 쉽사리 시도할 수 없게 만드는 것인가.


지금의 나는 사랑하기를 주저하고, 귀찮아하며, 두려워한다. 아마 나는 “사랑”이라는 단어 앞에서 무수히 많이 무너졌고, 그 마음이 사랑이 아니었음을 알아차리며 무너진 마음들을 회복하지 못한 게 아닌가 싶다. 굳이 사랑이라 부를 것 있던가. 단순하게 본다면 약간의 호기심, 나와 다른 차이점에 대한 관심, 상대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의리 등의 단어들로 대체 가능한 것 아니겠는가. 그래서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철학자들이 사랑을 정의하려 했고, 과학자들은 사랑을 증명하려 했고, 종교지도자들은 그 모든 사랑은 신의 은총이었노라 우겨왔겠다. 그 누구도 명확하게 사랑에 대한 가이드라인을 제공할 수 없어서 모두 겪는 사랑의 형태는 비슷하지만 다르고, 그래서 많은 드라마에서 단골 주제로 사용되는 것 아니겠나. 그런 의미에서 드라마에 나온 이야기를 좀 하자면, 한 드라마에서는 “우리에게 밤만 있는 게 아니라, 낮도 있는 걸 알려주고 싶었다”며 사랑을 말했고, 또 다른 드라마에서는 “날 추앙해요”라는 말로 사랑을 말했다. 그것이 진정한 사랑의 모습일지 아닐지는 모른다. 극 중 당사자들이 사랑이라 느꼈으면 사랑이겠다. 상대방이 조금은 특별해 보이기 시작하면서 감정의 싹이 틀 때, 언제나 그렇듯 아주 조금의 관심이었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지금의 나는 그 관심 갖기를 포기하고 내팽개쳐버렸다.


사랑을 믿지 않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믿지 않는, 어떤 한 사람에게 관심을 갖고 맞춰가기를 꿈꿨다. 그에게 사랑이란 감정을 느끼게 해주고 싶었는데, 다가오는 피드백이 힘겹다. 나는 감정이나 감성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사람이었다. 가능할 것이라 생각했던 명제 앞에서, 가능하지 않음을 발견했을 때 찾아오는 허탈감이 나를 또 좌절시키고야 만다. 우리가 사랑이라 부르던 그 모든 감정들이 사랑이 아니었음을 알게 되고 나니 좌절의 타격감마저 무던해진다. 어릴 적엔 이 감정이 구체적이지 않아서 뭉뚱그려 “이 모든 게 사랑이었습니다.”라고 말했겠지만, 이제는 그 마음도 저 마음도 내 마음도 모두 사랑이라 부를 수 없다고 정의 내릴 수 있게 되었다. 더 이상 그 달콤한 말에 현혹되지 않을 만큼 감성보단 이성을 더 추구하는 삶을 살아왔으니까.


그런데 이렇게 살아가는 게 정말 맞을까. 애초에 인생에 정답은 없다지만, 감정적인 부분이 늘 배제되어야 한다면, 인간으로서의 설렘과 끌림을 배제시키며 살아가야 하는 게 현대사회라면, 우리가 ai를 탑재한 로봇이나 기계와 다른 점이 무엇일 수 있을까. 사람과 사람으로 채워야 하는 일을 점점 기계에 의존하고 있는 우리 아니던가. 말할 사람이 필요해서 빅스비나 시리를 부르는 날이 생기고, 친구들과 어울리기보다 주식과 블록체인으로 모인 사람들과 생산성 있는 대화를 하겠다며 채팅방에 상주하고 있는 우리는 누구와 대화하고, 누구와 교감하고 있는 것일까.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정말 맞을까. 부디 이런 삶은 차선책이 아니었다고 말해줄 누군가를 마주할 수 있었으면 한다. 나의 사랑이 선의에 닿아, 이 모든게 연단의 과정이었노라 말해줄 수 있는 사람이 인생에 찾아와주기를 바란다.



매거진의 이전글 에너지의 차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