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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키티 구구 Oct 21. 2024

가을날

그날은 생리주기 첫날이었다. 생리를 시작한 지 2년이 넘었지만 여전히 익숙하지 않았다. 전혀 초대한 적 없는 몸의 반응이었다. 생리는 허리둘레와 아랫배를 걸쳐 통증을 주면서 하혈이 되는데, 걸을 때마다 생리대가 제대로 받쳐주지 못할까 봐 신경을 썼다.


그렇게 우울한 포즈와 표정으로 서 있으면 지은의 엄마는 도대체 왜 저러는지 모르겠다며 지은을 다그쳤다. 지난번에는 어기적어기적 걷는다고 지은을 혼냈다. 지은은 도대체 같은 여자인데 자신의 상황을 이해는커녕 상상을 못 한다는 게 이상했다. 지은의 엄마는 오늘 지은에게 어딘가를 가르쳐 주었다. '어딘가'라는 말이 맞게도 참 이상한 장소였다. 개인주택이 들어서 있는 골목이었고, 철제 난간이 세워져 있으며 그 난간에는 정원목이 심어져 있었다. 게다가 교복을 입고 서있으라고 해서 더 이상했다. 그날은 토요일이었고, 토요일 오후에는 교복을 벗고 평상복으로 외출을 해도 되기 때문이었다. 엄마는 지은에게 말했다.  "가서 서 있어야 해. 조용히 서 있어라."


지은은 가을바람을 맞으며 서 있었다. 오후가 저물 무렵이라서 바람은 제법 선선했고, 해는 점점 기울어가며 햇살이 길어졌다. 서 있던 지은의 귀가 쫑긋한 건 그때였다. 어떤 중형차에서 말소리가 들렸는데, 두 외국인-부부로 보였다-이 대화를 하고 있었다. 발음이 영어가 아니라서 이상했다. 지은이 보았던 영화 속의 외국인들은 모두 영어로 말했기 때문에 발음이 매우 굴러가는 소리였고, 지금 여기에서 들리는 소리는 뚜르르르하고 소리에 매디가 있었다. 그때, 뒷 문에서 무언가가 스르르 떨어졌다. 부모 중에 엄마로 보이는 이는 넘어져있는 아기를 바로 세웠다. 아기는 부모에게 옹알이를 잠시 하더니 지은 쪽으로 아장아장 걸어오기 시작했다. 지은은 아기가 걸어오는 것을 빤히 보았다. 아기는 입술을 오물오물거리며 옹알이를 했다. 지은은 아기의 눈을 가까이에서 보고 놀랐다. 아기의 눈은 분명 초록색이었다. 금발에 초록색 눈, 입고 있는 겨자색 아기옷까지 색깔이 아주 잘 어울렸다. 지은은 무릎을 굽히고 아기에게 무언가를 주었다. 그리고 말했다. "그린 그린 아이네. 얘가 네 눈 색깔이야." 아기는 지은이 준 나뭇잎을 갖고 유심히 관찰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는 다시 아장아장 걸어서 부모님 곁으로 갔다.


지은은 중학교 2학년이었다. 갑자기 영어로 얘기하자니 부끄러웠지만, 아기의 눈은 지은에게 영어로 말하는 용기를 주었다.


"Hello. My name is Jieun. I'm Bongeui Girls middlle school student. The baby's eyes look like a lake. Beautiful. Boy or Girl?"


지은은 아기의 부모가 대답하는 것을 들었다. 아기는 남자 아기이며, 자신들이 온 나라를 얘기했다. 지은은 고개를 갸우뚱하고 처음 들어보는 나라 이름에 자신의 좁은 세계관을 좀 한심하게 생각했다. 아기의 이름을 얘기했을 때, 지은은 이탈리아 이름으로 그 이름을 영화에서 봤던 생각이 들었는데, 물어볼 수 없었다. 지은이 준 이파리를 들고 있는 아기는 아빠 품에서 옹알이를 하며 잎을 계속 쳐다보다가 지은이 "안녕!"이라고 할 때 울음을 터뜨렸다.


가을바람이 그날 따라 더 몸에 휘감기는 기분이었다. 지은은 아무렇게나 길을 걸으며 차츰 기억을 잃어갔다. 그날 엄마가 가서 서있으라는 말을 왜 했는지도  아기의 이름도 아기의 부모가 왔다는 나라의 이름도 잃어갔다. 잊은 거면 다시 기억했을 텐데, 누군가에게 빼앗긴 것처럼 완전히 잃어버렸다.


지은은 그게 그렇게 중요한 건지 몰랐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무거운 발걸음으로 어서 이 생리가 끝나기를 빌었고, 앞으로 계속 매달 치르는 이 의식은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 걸까 하고 다시 나름의 숙제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손에는 초록색 이파리가 들려있었다. 지은은 잎을 한 장 뜯어서 앞니로 물었다. 쓰고 떨떠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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