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례길 27일 차: 만만히 봤다가

큰코다쳤다

by 탱탱볼에세이

비도 안 오고 어제에 비해 km도 적어서 쉬운 날이겠지 생각했다. 계속 내리막길이거나 계속 오르막길이라서 오늘도 쉽지 않았다. 거기다 오늘 묵을 마을에 도착했는데, 숙소가 없을까 봐 불안했다.


아니나 다를까, 아슬아슬하게 세이브했다. 제일 나중에 도착한 로자도 숙소를 예약해 둬서 다행히 모두가 행복하게 다 같이 머무를 수 있었다. 특히나 산을 넘을 때 엄청난 순례자의 행렬을 봐서 숙소가 없을까 봐 아찔했다.


독일인 레니가 마지막 줄에 있던 피터에게 자리가 혹시 없으면 자기 자리를 내주고 다음 마을까지 걸어가겠다고 했단다. 피터의 1층이었던 로자가 자기는 진짜 괜찮다고 1층을 양보해 줬다. 피터는 젊은이들의 양보에 고마웠지만 한편으로 나이 듦을 느꼈다고 한다. 내가 오늘 가장 고생한 만큼 운이 더 따른 것이라고 강조했다.


막판에 내가 속도가 붙어서 빠르게 걸었는데 어느 순간 피터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숙소에 다다랐을 때 줄곧 보이지 않던 피터가 바로 나타났다. 피터의 끈기에 엄청난 경외심이 들었다. 참고로 피터는 일흔이다. 레니도 로자도 대단한 양보를 보여준 것에 존경스러웠다. 사실 나라면 그렇게 흔쾌히 할 수 있었을까 조금 부끄럽다.


오늘의 경험이 다소 임팩트가 컸는지 레이요가 내일 숙소를 예약해 줬다. 마지막 남은 자리를 얻었던 캐나다 호도 불안함을 느꼈는지 앞으로의 모든 일정에 숙소를 예약했다고 한다. 잘 곳이 없다는 불안감에 하나둘씩 숙소 예약을 하기 시작한다. 나도 결국 해야 하는 걸까 마음이 동요한다.


산티아고가 50km 남은 지점 멜리데에서 프랑스길과 만난다. 프랑스길은 산티아고 100km 이전 지점부터 인증서를 받기 위해 엄청난 스페인 그룹이 몰려든다. 시작지점에서부터도 요즘은 붐빈다고 하는데, 얼마나 대단한 인파일지 감히 상상도 안 간다.


미리 숙소를 예약하고 길을 향하는 것이 순례인 건가 싶다. 그래도 진짜 숙소가 없어서 다음 마을을 또 걸어갔는데 또 없다면 그때는 저번처럼 성당 바닥에서 자야 하는 운명에 처하게 된다. 그렇다면 매일의 숙소를 미리 예약한 호가 현명한 거겠지. 호는 숙소 걱정 없는 이제야 순례를 편하게 즐길 수 있다고 좋아했다.


매일 나의 컨디션과 날씨는 변할 수 있고 계획보다 덜 갈 수도 더 갈 수도 있기 때문에 일단은 예약하지 않았다. 앞으로 순례자들의 거대한 행렬을 마주한다면 분명 걱정할 것이다. 하지만 각자의 순례길을 즐기는 방법이 있듯이 나도 내가 즐기는 방식을 일단 유지해 보련다. 그러다 또 큰코다칠지 모르지만. 그때는 그때의 또 방법이 있겠지! 내일 일은 내일 생각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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