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례길 30일 차: 오아시스

이제 산티아고까지 99km

by 탱탱볼에세이

30km를 걸어 루고에 왔다. 하도 요즘에 오르막길을 많이 탔더니 오늘은 다소 평이한 길이었다. 어렵진 않지만 가도 가도 끝이 없어 보였다. 중간에 오아시스가 나왔다.


벤치에 앉으니 세상 달달한 수박과 멜론을 잘라서 내어주시는 게 아닌가. 수분과 당분 가득한 과일을 먹으니 걸으며 쌓인 피로가 풀렸다. 이런 게 힐링이지. 어쩜 이름도 오아시스다. 오아시스 덕분에 남은 12km를 갈 힘을 얻었다. 기부제로 운영되어 흔쾌히 만족한 만큼 돈을 냈다.


나도 언젠가 이런 사막의 오아시스 같은 곳을 만들고 운영하고 싶다. 누군가 힘들 때 응원을 북돋아주고 싶달까. 그려려면 내가 더 에너지가 많아야겠지. 열심히 순례길 걸으며 사람들로부터 길로부터 좋은 기운을 얻는 중이다.


프랑스길은 이런 기부제가 중간중간 있는데 프랑스길 생각이 났다. 산티아고 50km 전 지점인 멜리데부터는 프랑스길과 만난다. 프랑스길이 8년 전보다 더 인기 있어졌다고 하는데 프랑스길은 지금 어떤 모습일지 기대된다.


이제 4일만 걸으면 산티아고다. 남은 km수가 세 자릿수에서 두 자릿수로 바뀌었다. 끝날 것 같지 않던 길이 서서히 끝이 보인다. 이번 순례길은 도착하는 것보다 매일 걷는 것에 크게 의미를 느낀다. 건강해서 걸을 수 있고 걸으면서 건강해지는 길이다. 지금 펼쳐진 길을 무리 없이 걸을 수 있음에 감사하다. 난 할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별로 없는데 일흔 살 할아버지 레이요랑 피터랑 걸을 수 있어 영광이다.


오늘도 하나의 루틴처럼 샤워하고 빨래하고 메뉴 델 디아를 먹었다. 정말 양도 푸짐하고 음식 맛도 좋았다. 덕분에 와인 두 잔을 말끔히 비웠다. 그도 그럴 것이 1903년에 연 식당이었다. 역사의 한 현장에 쏙 들어간 느낌이 들었다. 디저트로 산티아고케이크를 먹었는데 달달하니 맛있더라. 한국에 기념품으로 사가고 싶다. 물론 일정 때문에 다음을 기약해야겠지만.


매일 같은 숙소에 묵는 스페인-포르투갈 그룹이 있다. 흥이 많아서 노래도 맨날 부르고 밤에는 코골이도 하모니를 이룬다. 성당 가는 길에 만났는데 같이 사진 찍잔다. 나보다 인증사진 좋아하는 사람들 오랜만에 봤다. 발 하나씩 올려놓고 프리미티보길 안내문 나오게 사진찍은 거 다시 보니 되게 여고생 감성이네. 다들 에너지가 좋아서 금세 기가 빨린 건 비밀이다. 저녁에 같이 한 잔 하자고 제안해 주셨는데 피곤해서 다음을 기약했다.


포르투갈인 한 분이 한국에 10년 전에 다녀오셨다고 사진을 보여주시는데 경주, 설악산을 가셨더라. 진또배기로 한국여행을 하고 가셔서 내가 다 뿌듯했다. 코골이가 시끄러워서 경고를 오늘도 조심하라고 하던데 난 그 어떤 소음에도 잘 자서 다행이다. 내일을 위해 얼른 자야겠다. 이제 진짜 산티아고가 머지않았다. 가보자고. 아스타 산티아고.


*어제는 공립알베르게에서 자서 담요도 없고 차디찬 건물이라 엄청 추웠다. 오늘은 도심에 위치한 호스텔에서 자서 담요도 따뜻하고 안온하다. 이것이 바로 도시의 맛? 따뜻한 잠자리가 정말 소중한 순례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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