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안 오는 걸로 다행이다
26km 동안 거의 아스팔트 도로라 정신을 못 차렸다. 차가 슝슝 지나갈 때마다 위협을 느꼈다. 이제 오늘만 걸으면 3일 남았다는 생각에 꾸역꾸역 갔다. 중간쯤 갔을까 갑자기 비가 떨어졌다.
비가 오면 맞는 수밖에 없다. 그리고 맞으며 계속 걸어가는 수밖에 없다. 어쩌면 피할 수 없는 비 앞에서 세상 태연해진다.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비는 언젠가 멈출 거란 걸.
비를 실컷 맞고서야 비로소 비가 안 오던 오전이 그리워졌다. 한번 비가 내리기 시작하더니 오락가락 계속 왔다. 물론 나는 이미 많은 비를 맞아봐서 비 맞는 것이 더 이상 두렵지 않았지만. 오전의 아스팔트길이 지루하다 느낀 것에 대한 벌을 받는 듯했다. 어떤 길이든 그 나름의 의미가 있으니 불평 없이 오롯이 걸어야 하는 것이다.
비가 안 와서 다행이고. 오르막길이 심하지 않아서 다행이고. 땅이 질퍽거리지 않아서 다행이고. 참 다행인 일이 많더라. 하지만 불평하기 시작하면 정말 끝이 없다. 이래서 싫고 저래서 싫고. 점점 더 불행해진다.
어쩌면 다행인 일상을 내게 일깨우기 위해 걷는지도 모르겠다. 이미 많은 걸 가졌으면서 이래서 싫고 이래서 별로라고 스스로를 불행하게 만들었던 건 아닐까. 비가 안 오는 걸로 충분히 다행임을 비로소 배웠다.
무사히 걷고 오늘도 메뉴 델 디아로 마무리했다. 이제 내일만 걸으면 산티아고까지 50km다. 고지가 보이니 걸음을 멈출 수 없다. 내일은 길에 대해 어떤 불평도 하지 말아야지. 그냥 그 길을 받아들여보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