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산티아고까지 50km
아침에 든든히 식사를 했다. 출발하기 전 어제 편집한 영상을 유튜브에 올리고 싶었다. 나름 빨리 올라가나 싶더니 한 시간을 더 기다려야 했다. 아침에 빠르게 출발하지 않고 숙소에 있어본 적은 처음이었다. 마지막으로 남겨지니 불안해졌다.
갑자기 10분 전 숙소를 떠난 마티나가 돌아왔다. 뭔가 놓고 갔다며 열심히 찾더라. 순례길 동안 쓰려고 산 모자인데 잃어버렸다더라. 그러곤 갑자기 산티아고 숙소를 예약한다. 모르는 스페인어 입력창의 단어를 나에게 묻는다. 어차피 나도 업로드를 기다리는 와중이라 구글번역기를 켜고 도와줬다. 무사히 예약 성공.
마티나는 도와줘서 고맙다고 하며 한국말로 고맙다는 말을 배워갔다. 잊어버린 산티아고 숙소 예약을 하게 하려고 모자를 잃어버렸구나고 긍정적으로 극복해 냈다. 나도 옆에 마티나가 나타나서 심심하지 않았다. 나도 영상이 마침내 올라가서 같이 길을 출발할 수 있었다.
주변에서 굳이 그 힘든 길을 왜 걷냐고 왜 스페인까지 찾아가냐고들 그랬단다. 안 해보면 전혀 모르는 게 당연하다고 말했다. 덕분에 이 길이 얼마나 소중한 사람들과 함께 걸어 오히려 좋지 않냐고 받아쳤다. 혼자 걸을 생각 했는데 같이 걸을 친구가 생겨서 나도 신났다.
순례는 타투랑 비슷한 거 같다고 생각을 어필했다. 절대 한번 경험하면 한 번으로 안 끝나는 점과 동지들끼리 쉽게 서로를 알아보고 바로 친해지는 점을 들었다. 마티나는 내 생각에 공감하며 재밌어했다.
순례길을 걷다가 혼자 멈추고 싶으면 멈추면 된다. 마티나는 멈췄고 곧 따라오겠다고 먼저 가라고 한다. 나는 혼자 걷게 되었다. 원래 같이 걷는 무리인 레이요와 피터를 1시간 먼저 보냈지만 그들을 길에서 다시 만나고 싶었다. 물론 같은 숙소를 예약해서 어쨌든 만나긴 하는 거였지만.
열심히 스틱을 저어가며 틱틱택택 내 나름의 박자에 길을 이어갔다. 도로도 많지 않고 숲길이 대부분이라 편하게 걸었다. 먼저 걸어가는 순례자들을 마주칠 때면 조금은 희열감이 들었다. 그렇게 여러 명 앞서고 나니 매일 길에서 마주치던 산드라를 만났다.
안 그래도 나를 피터랑 레이요가 많이 찾고 있다고 내가 오길 기다렸단다. 8분 전에 갔으니 곧 따라가면 만날 수 있을 거라 격려해 줬다. 산드라는 자기의 쿠키를 나눠주며 힘을 줬다. 다시 만나서 너무 반갑다며 꼭 껴안아줬다. 포옹은 사실 매번 낯간지럽다. 그럼에도 누군가의 포옹을 받는 것은 참 따뜻한 일이다. 에너지를 힘껏 전해받는 기분이랄까.
걷다 보면 오른쪽 어깨가 아파온다. 한참을 기운 없이 꾸역꾸역 가고 있었는데 산드라를 만난 덕분에 완전히 충전이 되었다. 먼저 가보겠다고 길을 나서고 처음으로 순례길에서 부스터를 단 듯 뛰어봤다. 통통통통. 물론 뜀박질은 잠깐이었지만 점점 피터와 레이요랑 가까워져 가는 기분이 들었다.
한 10분을 걸었을까. 마을 초입에 도착한 피터와 레이요가 보였다. 시끄러운 스틱소리에 들킬까 봐 조심조심 뒤를 밟았다. 머지않아 바가 나왔고 그들은 멈췄다. 짜잔! 놀라게 해줬다. 정말 반가워서 피터와 포옹했다. 내 등이 축축함을 충분히 전해줬다.
6km를 남겨놓고 우린 다시 만났다. 커피로 또 에너지를 충전했다. 오늘따라 프리미티보길에 사람이 별로 없다며 희한하다고 의견이 모였다. 길도 크게 굴곡진 곳이 없어서 무난하게 멜리데에 도착했다.
확실히 공기부터가 달랐다. 숙소에 도착하니 순례자들이 줄 서있더라. 뜨거운 순례길의 열기를 바로 느낄 수 있었다. 숙소 예약 안 했으면 어쩠을 뻔했는지 아찔하다. 우리 빼고 다들 프랑스길에서 온 순례자들이었다. 분명 나도 예전에 프랑스길을 걸어봤고 멜리데에 와봤는데 정말 새로운 기분이다. 뭔가 프랑스길 순례자들 사이에서 이방인이 된 듯하다.
샤워하고 시내에 나왔다. 배고픈 하이에나처럼 메뉴 델 디아를 찾아 헤맸다. 여기저기 북적이는 식당은 많았으나 메뉴델디아는 없더라. 빠에야를 먹었다. 손님이 많은데 종업원은 한 명이라 영혼이 나간 상태에서 일하고 있었다. 과거의 나를 보는 것 같았다. 웃음을 완전히 잃은 얼굴이었다. 와중에 레이요가 식당 벽에 있는 문구를 읽어줬다. 웃음이 없는 날은 완전 잃은 날이다. 우린 오늘도 무사히 목적지에 도착해서 웃을 수 있었는데 종업원은 그렇지 못해 보여 씁쓸했다.
순례자들이 하나둘씩 이탈하기 시작했다. 길에 안 보인다. 어젯밤 같은 숙소에 머문 호도 로자도 길에서 못 봤다. 이틀날밤 같은 숙소에 머문 레니도 어제부터 안 보이고. 하지만 우린 핸드폰으로 연결되어 있다. 다들 잘 숨어있더라. 조만간 길에서 또는 산티아고에서 다시 만나기로 했다.
레이요가 오늘 프리미티보길 마지막날이라고 와인과 치즈를 쐈다. 기념적인 날 멋지게 보낼 줄 아는 센스쟁이다. 맛있는 치즈와 달콤한 와인을 즐기며 세탁기를 돌렸다. 뭔가 예상치 못한 문제로 탈수가 잘 안 되었지만 숙소주인이 친절하게 탈수를 한 번 더 돌리게 해 줬다. 빨래가 탈탈탈탈 빠르게 털리는 모습을 감상하며 여유를 즐겼다.
거의 순례길에서 처음으로 뜨겁다 못해 따가울 정도로 빠삭하게 말린 빨랫감을 맞았다. 얼마 만에 느껴보는 뽀송함인지! 맨날 손으로 빨래하고 햇볕에 말리면 중간에 비 와서 80~90% 말린 옷을 입어야 했는데 말이다.
내일은 그래서 30km 걸어야 하지만 즐겁게 즐길 수 있을 것 같다. 숙소 바로 밑에 아침식사 6시에 여는데 3유로 하는 곳도 찾아서 시작부터 좋을 것이다. 와우 이제 잠들려는데 1층에 무슨 바가 있는지 클럽음악이 끊임없이 나온다. 대박 시끄럽다. 오우 예상하지 못한 복병을 만났다.
드디어 프랑스길을 걷는다. 물론 2 일동안만이지만 얼마나 많은 순례자들이 같은 길을 걸을지 기대된다. 숙소로도 슬쩍 열기를 느끼긴 했지만. 오늘 건조기에서 갓 꺼낸 빨랫감만큼 뜨겁진 않기를 바라본다. 이제 산티아고까지 50km. 산티아고가 나를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