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멜리데에서 아침 6시에 출발했다. 숙소 앞에 바에서 아침을 3유로에 먹을 생각에 설렜는데 일요일이라 그런지 닫았더라. 아쉬움도 잠시 다음 마을에서 아침을 기약하며 걷기 시작했다.
분명 오늘부터는 한번 걸어본 프랑스길인데 하나도 길이 익숙하지 않았다. 8년 전이라 그런 것일까. 정말 민망할 정도로 완전히 새로웠다. 다만 아침에 일찍 출발하면 좋은 게 길이 완전 내 것 같았다. 우리 말고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마치 길을 돈 주고 빌린 기분이랄까.
그렇게 6km 정도를 걷자 아침식사를 할 수 있는 바가 보였다. 숙소랑 병행해서 하는 곳이었는데 지난밤에 엄청난 스페인 청소년 단체를 받았나 보더라. 단체 아침식사가 주루룩 차려져 있었다.
보통 아침식사를 거하게 먹으면 길에서 화장실 가고 싶어진다. 그래서 최근엔 거한 아침식사는 잘 안 챙겨먹고 따뜻한 카페라테만 한 잔 마셨다. 이젠 2일 남았고 화장실도 있으니 편하게 초코빵에 카페라테에 오렌지주스 세트를 5유로에 즐겼다. 열심히 걷고 먹으니 더 맛있더라.
아침식사로 기운을 차리고 걷는 와중에 순례길을 지나는 한국인 단체 사이클링팀을 마주쳤다. 스페인 순례길이지만 한국에 온 기분이 들어 반갑더라. 스무 분 넘게 자전거를 이어서 타시는데 순례길을 함께 하시다니 대단했다. 한 분이 코리아 파이팅 하고 지나가셨는데 그점이 인상깊었다. 이렇게 먼 곳까지 다 같이 오신 것이 한국인이니까 가능한 팀워크이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뭔가 국뽕에 차올랐다.
한국인의 기운을 든든히 얻어 계속 전진했다. 33km 거리는 실제로 길었다. 계속 걸어도 첫 10km를 깨기가 쉽지 않더라. 15km 절반의 거리를 성취하고서 바를 들려서 커피를 마셨다. 따뜻한 커피는 언제 마셔도 참 안온하게 만들어준다. 걸은 거리만큼 뿌듯함을 안겨준다.
다시 걷다 보니 어제 같은 숙소에 묵었던 한국분을 만났다. 이번이 두 번째 프랑스길이라고 하신다. 6년 전 처음 걸으셨는데 지난 순례길의 기억이 너무 좋아서 또 오셨다니 반가웠다. 신기하게 이번에 피레네산맥 넘으실 때 눈을 보셨다고 한다.
눈 쌓이는 피레네라는 진귀한 풍경을 만났다니 부럽더라. 보통 겨울엔 눈이 많이 와서 피레네가 폐쇄되기 때문이다. 눈바람이 시야를 가려서 제대로 즐기지 못하셨다고 하셨다. 그래도 누구나 할 수 없는 경험이기에 전해 듣는 것만으로도 설레더라.
나는 다시 피레네산맥을 또 넘을 수 있을까 싶었다. 헉 그 가파르고 끊임없는 오르막길을 알고도 또 간다고? 좀 더 기억의 미화가 필요할 듯하다. 물론 오리손에서 1박은 미리 예약해서 필수로 묵어야 하고 말이다.
세 번째는 25km 넘어서 멈췄다. 레이요의 딸인 리까의 서른두 번째 생일을 축하해 주기 위함이다. 휘바 순 뜨마 바이바. 우린 걸으면서 생일축하해를 핀란드어로 계속 중얼거렸다. 아주 멋지게 외워서 영상통화로 축하해 줬다.
말끔하게 오늘의 임무를 완수하고 생맥주를 한 잔 했다. 짜릿했다. 산티아고에 도착하면 다음 주에 생일인 피터의 손자 레이비의 생일을 네덜란드어로 축하한다는 비디오를 촬영할 것이다.
힘을 내서 걸었고 마지막 4km 남은 지점에서 마지막 커피를 마셨다. 생각해 보니 4번이나 멈췄더라. 확실히 프랑스길에 스페인 단체도 있고 순례자도 많았던 탓일까. 길 자체는 평이한데 길이가 길고 사람들이 많아서 그런지 피곤함을 쉽게 느꼈나 보다.
놀라운 것은 정말 아르 쑤아에서 묵었던 숙소 빼고 하나도 기억나는 게 없다는 것이다. 거기다 예전에 벽면에 쓰여있던 글귀들도 모두 바뀌었다. 같은 길이었지만 모습은 사뭇 달랐다. 내가 경험한 것이 언제든 바뀔 수 있으며 심지어는 경험했어도 전혀 모를 수 있음을 깨달았다. 이제 한번 경험했다고 으스대지 말아야지.
무사히 오늘도 페드로조라는 산티아고가 19km 남은 지점에 도착했다. 반가운 프리미티보길 친구들을 다 만났다. 프랑스길 순례자가 대다수인 지금, 같이 걸어왔던 프리미티보길 동무들이 더 소중해졌다. 함께 저녁을 먹으면서 시답잖은 이야기 하며 깔깔 웃었다. 내일은 산티아고에 오후 1시에 모여 같이 사진 찍고 파티하자고 기약했다.
나는 새벽 5시에 최대한 빨리 출발해서 얼른 산티아고에 가고 싶다고 말했다. 그게 조용하고 깜깜하면 잘 안 보여서 많이 걸어도 많이 건 지 피부로 못 느끼기 때문에 더 쉽게 걸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미 가방도 다 싸두었다.
눈 뜨면 바로 출발해야지. 드디어 내일이면 산티아고다. 산티아고 대성당 공사가 끝났다. 완성된 성당의 실물을 영접할 수 있다니 대단히 설렌다. 다들 산티아고에서 다시 만나자! 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