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유불급
항상 숙소에 도착하면 그다음 날 일정을 계산한다. 어디 마을까지 가면 숙소가 있을지 미리 알고 출발하기 위함이다. 한번 성당 바닥에서 자고 나서 생긴 습관이다.
오늘은 바닷길을 쭉 따라오는 일정이었는데 같은 듯 다른 듯 바다가 계속 펼쳐졌다. 처음엔 바다를 봐서 좋았는데 나중엔 하도 바다만 나와서 좀 질리더라. 스페인 사람들은 평일인데도 다들 해수욕을 하러 나와있었다. 역시 잘 노는 것에 진심인 나라랄까. 그 여유가 부럽다.
목표로 생각한 마을에 도착하기 두 곳 정도 전쯤에 부킹닷컴에서 숙소를 예약했다. 1시간 거리였다. 요즘은 오전에 걸을 만큼 걷고 체크인 시간인 오후 1시에 맞춰서 멈춘다. 매일 스치는 많은 순례자를 볼 때면 숙소에 대한 불안이 증폭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잘 쉬어야 또 걸음을 지속할 수 있다는 그간의 교훈이 날 멈춰준다.
해안길로 오니 공립 숙소가 잘 없더라. 오능은 사립 알베르게에 17유로에 머문다. 공립 알베르게 숙소는 8-10유로 정도이고, 사립 알베르게는 17-20유로 정도다. 공립 알베르게에 머물고 아낀 돈으로 먹는 메뉴 델 디아가 더 맛있기 때문에 보통은 공립 알베르게에 머문다.
공립 알베르게는 기본적인 시설이 갖춰져 있고 저렴하기 때문에 순례자들도 나도 주로 찾는다. 내일은 공립 알베르게에 가고 싶지만 30km 넘게 걸어야 해서 쉽지 않을 거 같다. 일단 힘내서 걸어보려고 납작 복숭아를 다섯 개나 샀다.
숙소에 도착해서 샤워하고 빨래하고 부모님이랑 영상통화하면 마음이 편안하다. 하루의 숙제를 무사히 끝낸 기분이다. 그러면 마지막으로 해야 할 일은 배를 채우는 일이다. 근처 레스토랑을 찾아 메뉴 델 디아를 먹는다.
메뉴 델 디아는 코스요리로 요리 두 접시, 와인-맥주, 디저트까지 한꺼번에 먹을 수 있는 구성이다. 보통 11유로~20유로 정도로 합리적인 가격에 판매되기 때문에 하루에 메뉴 델 디아 한 번으로 모든 식사를 해결한다. 아침 점심을 건너뛰는 이유다. 하루동안 고생해서 걸은 나에게 주는 보상이랄까.
프리미티보 길에선 피터랑 레이요가 내 메뉴 델 디아 동지였다. 함께 맛있는 음식 먹을 수 있어서 열심히 걸을 수 있는 동력이 됐다. 지금은 거꾸로 걷는 순례길이라 친구가 없어서 혼자서 메뉴 델 디아를 먹는다.
오늘은 와인 한 병을 갖다주셨다. 레스토랑마다 한 잔 따라주는 데도 있고 한 병을 통으로 주는 데도 있고 주는 건 주인마음이다. 와인 한 병을 혼자 마시다니. 부담스럽지만 신났다. 걸어서 2분 거리에 숙소가 있어서 걱정 없이 마셨다. 열심히 홀짝거려서 순례길 처음으로 와인 한 병을 비웠다.
Sabaris 이 동네의 메뉴 델 디아는 12유로였다. 계산하고 나가려는데 스페인 아저씨가 말을 건다. 공손하고 예쁜 아시아인을 좋아한단다. 아까 어쩐지 밥 먹고 있는데 맛있게 먹으라고 스치듯 말하고 갈 때부터 불안했다. 커피 한 잔 사주겠단다.
No라고 외치며 와인을 많이 마셔서 숙소 가서 빨리 자고 싶다고 했다. 그랬더니 자기 집에서 자도 된단다. 구글 번역기로 열심히 어필하시는 게 대단히 잘못 걸렸다. No라고 여러 번 거절하고 얼른 동동걸음으로 숙소로 들어왔다. 여자 혼자 여행하는 것이 이럴 때 위험하다.
와인 한 병의 위력은 대단했다. 단숨에 낮잠에 들었다. 두 시간쯤 지나 저녁 8시쯤 깼을까. 갑자기 비가 추적추적 내렸다. 내 빨래. 아차 싶었는데 아까 잠깐 대화 나눈 네덜란드 부부가 실내로 들여놔줬더라. 감사하다. 휴가가 50일 정도 있는 유럽사람들은 휴가를 활용해 순례길을 걷는다. 빨래를 걷고 물 한 병을 다 마셨다.
역시 와인 한 병은 내게 너무 과했다. 어질어질해서 다시 잠에 드는 일 말고는 할 수 없더라. 그래서 새벽 1 시인 지금 깨서 쓴다.
앞으론 혼자서 와인 한 병이 나오더라도 절대 세 잔이상 마시지 말기로 한다. 와인 한 병에 저녁시간이 아예 날아갔기 때문이다. 과유불급. 옛말은 하나도 틀린 게 없음을 깨닫는 새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