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정도면 호텔이다
아침 6시에 숙소를 나섰다. 오늘 숙소는 체크인이 오후 2시인데 침대가 28개뿐이라 걱정됐기 때문이다. 침대가 많으면 좋으련만 포르투갈의 인기 덕분에 항상 침대가 모자란 기분이다. 그래서 항상 조급하고 불안함이 자리 한편에 존재한다.
오늘은 20km만 걸으면 되는 다소 짧은 일정이었다. 하지만 내 걸음은 여전히 느리고 자주 멈춰서 안전하게 일찍 출발했다. 이럴 땐 부지런을 떠는 내 성격이 참 도움이 된다.
혼자 쫑알거리면서 에펠 다리를 넘었다. 에펠탑을 설계한 구스타프 에펠이 설계한 다리란다. 기차도 지나다니고 차도 지나다니고 사람도 지나다닌다. 특별한 것은 없었지만 에펠의 브랜드에 취해 특별하게 느껴졌다. 아침에 일찍 넘어서 상대적으로 차가 적어서 다행이었다. 중간중간 차가 너무 쌩쌩 달려서 덜컥 겁이 나더라.
분명 포르투갈 해안길을 걷고 있으나 오늘은 온통 숲길을 걸었다. 지금 시기가 걷기 좋은 게 비도 안 오고 해도 쨍쨍하지 않아서 큰 시련을 겪지 않을 수 있다. 그저 눈앞에 펼쳐진 길을 받아들이고 걸으면 될 뿐!
그러다 오아시스 같은 기부제 공간을 만났다. 과일도 많고 찐 계란도 있고 맥주에 캡슐커피에 얼음 가득 담은 음료수까지. 프랑스길의 추억을 떠오르게 했다. 마음껏 즐기고 즐긴 만큼 기부하면 되었다.
나중에 나도 이런 공간 운영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막연히 생각했다. 누군가 고군분투하고 있을 때 찐하게 응원할 수 있는 공간 말이다. 상상만으로도 설렌다. 물론 기부제로 운영은 어렵겠지만.
같은 시간에 멈춘 프랑스인 할머니 둘이랑 찐 계란을 까먹으며 즐겼다. 알고 보니 두 분 시누이와 올케 사이였다. 어떻게 둘이서 순례길을 걷지? 대단한 문화충격이었다. 한국에서도 이게 가능할까? 어쨌든 두 분 사이가 돈독해 보이셔서 부러웠다. 나도 같이 걸을 친구가 있으면 좋겠다.
무사히 숙소에 오후 1시에 도착했다. 체크인이 한 시간 남았는데도 이미 순례자가 8명 정도 도착해 있더라. 오늘도 잘 곳이 있어서 다행이다. 한번 성당 바닥에서 잔 뒤로 트라우마가 생겼다. 숙소가 열린 지 세 시간 만에 모든 침대가 다 주인을 만났다.
여긴 가격이 10유로인데 세탁기, 건조기 사용이 무료다. 부엌도 있고 컴퓨터도 있고 헤어드라이기도 있다. 샴푸워시도 있다. 자판기도 합리적인 가격에 물건을 판다. 이런 곳은 처음 봤다. 이 정도면 호텔이다. (숙소 사장님들이 이 말을 들으면 좋아하신다.)
한국에서 당연하게 누리던 일들이 순례길에선 뭐든 어렵다. 세탁기가 없어서 손 빨래 해야 하고. 헤어드라이기가 없어서 햇빛과 바람에 머리를 말려야 하고. 수건이 없어서 스포츠타월 가지고 있어야 하고. 이불이 없어서 침낭을 챙겨야 하고. 빨래집게가 없어서 빨래집게도 따로 챙겨 와야 하고. 부엌이 있는데 주방집기가 없어서 요리를 못한다. 물론 샴푸바디워시도 없어서 개인지참 필수!
사실 이 덕분에 항상 모든 것이 다 갖춰질 수 없음을 배우게 된다. 그저 마주한 상황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어서 이것으로도 충분하다는 것을 매번 주문처럼 외우게 된다. 그런 길에서 아주 특별하게 오늘은 혜자스럽다는 표현이 절로 나올 정도로 이상적인 기부제 공간과 숙소를 만났다.
항상 부족한 상황에서 걷다 보니 풍부한 인프라를 만나니 얼마나 감사한 지. 한국으로 돌아가면 안분지족의 삶을 더 즐길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또 리셋돼서 예전처럼 갖고 있는 걸로 만족 못해서 결국 더 많은 걸 되려나?
순례길에서 처음으로 무료로 세탁기를 돌리고 건조기를 돌리는 중이다. 오랜만에 상쾌하게 말린 옷을 입을 생각에 벌써 걷고 싶다. 여기저기 혜자스러움에 든든한 힘을 얻은 하루였다.
이제 포르투까지 3일 남았다. 작심삼일이어도 충분한 상태다. 순례길이 끝나는 게 아쉬워서 산티아고에서 거꾸로 걷게 됐는데 과연 포르투에서 길을 끝낼 수 있을까.
8년 전과 다르게 너무 인기 있어진 포르투갈 순례길에 매일 놀랐다. 결국 이 길에서도 북쪽길과 프리미티보길, 프랑스길처럼 숙소 걱정을 할 수밖에 없더라. 이것은 어쩌면 순례길이 아니라 숙소를 위한 보이지 않는 마라톤일지도? 남은 3일 동안엔 혜자스럽지 않아도 되니 그저 숙소 걱정은 안 하길 진심으로 바라본다. 아름다운 마무리를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