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을 돈으로 살 수 있다면

놀이동산에서 자본주의를 경험하다

by 탱탱볼에세이

바나힐에서 가장 인기 있는 놀이기구는 루지다. 유명세답게 이미 많은 사람들이 줄을 서있었다. 여기까지 왔는데 한 번은 타봐야 하지 않겠냐며 우리도 루지 대기줄에 섰다.


루지는 다른 놀이기구와 다르게 슈퍼패스를 7만 동(4천 원)을 내고 구매하면 대기하지 않고 바로 탈 수 있다. 그 사실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지만, 한국 놀이동산에 비하면 짧은 대기 줄이라 따로 슈퍼패스를 구매하지 않고 기다렸다. 놀이동산의 얄팍한 상술에 돈을 벌어주고 싶지 않기도 했다. (이럴 때만 드러나는 반골기질)


우리 바로 뒤에 한국인 부부가 줄을 섰다. 여기가 루지 줄이 맞냐고 내게 물어보셨다. 맞다고 답하며 슈퍼패스의 존재를 알려드렸다. 한 10분을 기다리다가 빠르게 판단하시고 슈퍼패스를 사서 먼저 타러 가시더라. 기다리다가 다리 아파서 골골 대는 것보다는 돈 더 주고 빨리 타는 게 낮겠다는 이유였다. 우린 다리가 튼튼하니 괜찮았다.


한 30분 정도 기다리면서 꽤 많은 사람들이 슈퍼패스를 쓰고 먼저 놀이기구를 타러 갔다. 시간을 돈으로 살 수 있다면, 저들처럼 사는 게 맞았을까. 4천 원이 사실 부담되는 돈은 아니었다. 충분히 금방 기다릴 수 있을 것 같았기에 돈을 쓰지 않은 것일 뿐.


슈퍼패스를 쓰는 사람들이 늘어나자 그 생각은 좀 달라졌다. 언제든 돈만 내면 나보다 늦게 온 사람들이 먼저 탈 수 있었으니까 말이다. 우린 교통편+입장권이 포함된 투어로 와서 시간이 한정되어 있었다. 대기 시간이 길어질수록 기다리기만 하다 가 혹시 놀이기구를 못 타는 것이 아닐까 약간 초조해졌다. 늦게라도 슈퍼패스를 사야 하나 싶었지만, 구매할 마음이었다면 아예 기다리기 전에 샀어야 할 터. 그렇게 자본주의 앞에서 나의 신념을 지키는 것이 어렵다는 걸 깨달았다.


우리 바로 앞에 있던 한국 그룹은 슈퍼패스의 존재를 뒤늦게 알게 됐다. 외국인들만 먼저 들어가길래, 뭔가 있는 줄은 알았지만 그게 무엇인지는 몰랐던 것이다. 기다리면서 “자본주의의 폐해”라고 비슷한 말을 혼자 중얼거렸는데, 그때 내가 한국인인 것을 아시고 말을 거셨다. 슈퍼패스의 존재를 물으셨고 친절히 설명해 줬다. 그랬더니 버럭 화를 내시며 일행들에게 하소연을 하셨다.


“한국어로 크게 슈퍼패스라고 써놨어야지.

우린 영어를 못 하는데.

가이드는 왜 이런 걸 안 알려줬지.

진작 알았으면 우리도 슈퍼패스 샀을 텐데.

4천 원이면 비싸지도 않구먼.

이렇게 오래 안 기다렸지.”


같이 대기줄을 기다렸던 입장에서 들리는 한국말은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우린 슈퍼패스의 존재를 처음부터 알고 있었고, 심지어 슈퍼패스 살 돈이 없던 것도 아니었는데 구매하지 않고 줄을 기다렸기 때문이다. 다들 슈퍼패스를 알았다면, 기다리지 않고 구매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왜 바나힐은 이런 돈 주고 시간을 살 수 있는 슈퍼패스를 만들어서 기다리는 사람을 바보 만드는지 씁쓸했다. 롯데월드처럼 시간을 예약해서 탈 수 있었다면 기다리는 게 좀 덜 억울하게 느껴졌을까. 아마 슈퍼패스의 가격이 만 원 정도로 더 비쌌다면 상대적 박탈감까지 느껴졌으리라.


4천 원이 정말 싼 것일까. 평소 일상에서는 돈을 벌기 위해 시간을 무지 쓴다는 걸. 힘들게 시간을 들여 번 돈으로 해외여행을 온다. 한정된 여행일정으로 기다림의 시간을 돈으로 다시 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어쩌면 피땀눈물이 담긴 가장 비싼 4천 원일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끝까지 루지를 기다려서 탔다. 대기줄 표지판에 예상대기시간이 1시간이 넘어서 걱정했는데 훨씬 빨리 타서, 오히려 시간이 남더라. 한 번쯤 타볼 만했다. 기다림의 값이 상당했지만 말이다. 슈퍼패스를 안 사서 아낀(?) 돈으로 기념사진을 구매했다. (남는 건 역시 사진이니까)


시간을 돈으로 사지 않고 오롯이 기다려보니 알겠더라. 지금이 얼마나 소중한 시간인지. 한번 지나간 시간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엄마랑 단둘이 해외여행하는 날도 또 언제 올는지. 결국 지금 주어진 시간을 즐기는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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