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아테네 첫인상

그라피티로 도배된 거리

by 탱탱볼에세이

8년 만에 다시 찾은 유럽. 싱가포르에서 새벽 5시에 비행기를 타고 11시간을 날아와 그리스 아테네에 똑 떨어졌다. 낮 1시 너머서 도착하니 깜깜한 밤이 아니라 두려움에 헤매지 않을 수 있었다. 엄마가 지난 여행에서 남은 유로와 달러를 가져다주셔서 첫 며칠을 적응할 수 있는 현금을 확보했다. 엄마가 아니었으면 현금 없어서 도착하자마자 조금은 골치가 아플 뻔했다. 몇 수를 내다보는 엄마가 최고다. 고로 엄마한테 잘하자.

시내까지는 지하철 타고 1시간이 걸린다. 무겁게 짐을 메고 있어서 그 시간이 유난히 길게 느껴졌다. 아테네 지하철은 마치 우리나라 1호선 같았다. 손 내밀고 구걸하는 할머니, 피리 불며 버스킹 하는 여자꼬마, 코로나로 인한 경제위기 얘기하며 볼펜 파는 아저씨. 친숙한 듯 오버랩되는 풍경은 첫인상부터 불편하고 무거운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사람이 많이 타고 있었는데 내릴 때 어떤 남자가 걸리적거리게 했다고 투덜거리면서 내리자 그 얘기를 들은 남자와 둘이서 시비가 붙었다. 폭력적으로 문이 닫히지 않게 다리를 걸고 불쾌함을 표현했다. 계속 그러고는 없을 노릇이라 다리를 빼고 열차가 출발했다. 그럼에도 분이 풀리지 않은 남겨진 남자는 열차 문을 크게 주먹으로 때리며 온 세상 사람들이 다 쳐다볼 수 있게 성을 냈다. 물론 모두들 그 사람을 보고 과하다는 눈빛을 보냈다. 이런 사나운 지하철을 처음부터 타고나니 더 이상 지하철을 타고 싶지 않았다.


숙소가 있는 지하철역에서 무사히 내렸다. 나가는 출구에 표를 찍었는데 오류가 뜨더라. 역무소에 가서 도와달라고 했다. 그랬더니 네가 출발할 때 안 찍어서 그렇다고 했다. 난 출발할 때 찍었는데. 역무원 아저씨가 내 티켓을 입구에서 찍어보더니 이상함을 감지했다.


얼마짜리 티켓을 끊었냐고 물었다. 공항에서 시내까지 90분 티켓을 6유로에 끊었다고 답했다. 왜냐면 자동판매기에 90분 티켓만 보였기 때문이다. 아저씨가 공항에서 오는 거면 9유로를 끊었어야 됐다고 크게 호통쳤다. 사실 열차 내에서 자꾸 9유로 티켓을 전광판에 안내하길래 타고나서 불안하긴 했다. 여기서만 고백하건데 공항에서 자주 쓰는 카드 하나를 길거리에 흘려서 당황해서 경황이 없었다. 아저씨가 주의를 주니 그제야 정신이 차려졌다. 다행히 다음부터는 제대로 표를 끊으라고 한 번 더 강하게 말하며 문을 열어주었다. 다음엔 꼭 제 돈 내고 타겠습니다.. 꾸벅...


숙소에 오니 친절하게 직원이 맞아주었다. 카드키 문 여는 방법을 설명하기 위해 카드키 태깅하는 도어록과 카드키 꽂는 장치를 그대로 안내데스크에 가져왔더라. 거기다 와이파이도 QR코드로 안내해 두었다. 이렇게 꼼꼼하고 섬세한 안내를 하는 숙소는 처음이었다. 한국인 관광객의 평가가 좋고 그냥 역 바로 근처라고 해서 예약했는데 첫인상이 마음에 들었다.


잃어버린 카드 분실신고를 하고, 유로 환율을 확인하니 여전히 1,420원 대였다. 그래서 오늘도 환전을 안 하고 있는 현금 쓰기로 했다. 짐을 풀고 준비하고 나가니 저녁이었다. 사실 비행기를 3번 타느라 몸이 너무 지친 상태라 멀리 가진 않았다. 다행히 숙소가 메인 광장에서 도보로 15분 거리라 걸어갔다.


마치 그리스 건물 인테리어가 그라피티인가 싶을 정도로 흉측한 낙서가 도배되어 있었다. 가끔씩 정성스러운 그림들도 있긴 했지만, 거의 모든 벽면이 뭔지 모를 칙칙하고 살벌한 색깔로 칠해져 있더라. 예상했던 거보다 더 많이 우울함이 도시 전체에 깔려있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도 가로수는 오렌지나무가 많아서 확실히 그리스는 그리스구나 싶긴 했다. 오렌지나무가 없었다면 황폐한 느낌이 더 짙었을 텐데 주황색 열매가 주렁주렁 달려있는 나무가 있으니 그나마 분위기가 상쇄되었다. 가로수에 있는 오렌지는 과연 누가 따먹을까 궁금해졌다.


저녁은 요거트케밥을 먹었다. 원래 그 식당을 가려고 했는데 웨이터가 눈 마주치자마자 반겨줘서 흔쾌히 영업당한 척하며 앉았다. 10유로가 넘길래 크게 나올 건 알았는데, 엄청 푸짐하게 나왔다. 너무 짜고 기름져서 처음엔 배고프니 맛있었지만 먹다 보니 물려서 결국 남겼다. 계산하려 하자 웨이터 아저씨가 내가 최고의 손님이라고 치켜세워줬다. 말 한마디로 천냥을 갚는다는 건 이 아저씨 보고 하는 소리 같았다. 서비스 매너가 몸에 배어있어서 대접받으며 기분 좋게 식사를 했다.

길목에 있는 테이블에 앉아 밥을 먹었는데, 구걸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조그만 돈통 들고 돈 달라는 여자꼬마, 북치며 돈 달라는 여자꼬마, 껌 파는 할머니, 뭐라고 중얼대는 종교인 같은 아줌마. 동남아에서도 흔히 있던 일이긴 하지만 여긴 꼬마들까지 이러니까 조금은 서글펐다. 아까 돈 구걸하던 꼬마가 누구한테 돈 받았는지 나중에 다시 만나니 아이스크림 먹고 있더라. 행복한 표정이라 다행이었다.


그리스 와서 놀란 것은 날씨가 아직 너무 쌀쌀하다는 것이다. 반팔 반바지 입고 나갔다가 춥다는 말을 달고 살았다. 밥 먹고 H&M에서 긴바지를 샀다. 확실히 한 나라의 수도라 그런지 엎어지면 코 닿을 곳에 유명한 SPA브랜드 매장이 있어서 다행이었다. 그나마 안전한 선택을 합리적인 가격에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족스러운 쇼핑을 마치고 아크로폴리스가 잘 보이는 루프탑 바에 갔다. 4층이었는데 풍경이 정말 장관이었다. 사람들로 북적였다. 저녁 되니 날씨가 더 쌀쌀해져서 그리스 커피를 주문했다. 찾아보니 그릭 전통커피 가루 1스푼을 물 담은 작은 포트에 직접 넣고 차 숟가락으로 저어가며 끓이다가 한 번 거품이 일면, 불을 끄고 잔에 담아주는 거였다.

아무것도 모르고 나오자마자 홀짝홀짝 마셨는데, 지금 찾아보니 10분 기다렸다가 마시는 거란다. 웨이터가 설명해주지 않아서 몰랐다. 어쩐지 목구멍에 계속 커피가루가 걸려서 잘못 걸렸다고 생각했다. 거의 다 마셔갈 때쯤 바닥을 보니 커피가루가 가득 쌓여있더라. 목에 가루가 걸리적거려서 마치 도라지가루를 물에 타 마신 듯 한 기분이었다. 물론 10분 기다려서 마셨더라도 가루 양이 꽤 많아서 가루를 완전히 피할 순 없었을 것 같다. 조금 씁쓸한 맛이라 설탕을 조금 넣어달라고 하는 것이 별미라고 한다. 나는 참고로 지조 있게 설탕 빼고 달라고 했다. 아무것도 모르고 커피를 들이켠 나는 씁쓸하기만 했다. 프라뻬라는 네스카페커피가 그리스에서 유명하다고 한다. 조만간 그리스커피 대신 마셔봐야겠다.

해가 질 무렵 계산하고 나왔다. 지금은 서머타임이 적용되고 해가 길어지는 시점이다. 해가 저녁 8시가 다돼서야 진다. 숙소에 돌아가려다 4층짜리 장난감 매장이 눈에 띄었다. 아이들을 위한 상점으로 크게 쓰여있었는데 홀린 듯 들어갔다. 3월 막바지라 아이들 부활절 선물이 많이 보였다. 계란모양의 초콜릿 안에 장난감이 담긴 형태다. 킨더 서프라이즈 에그가 제일 유명하다고 한다. 마치 제2의 크리스마스 선물 같이 화려하달까. 선물 받을 아이들이 부러워졌다.

얼결에 장난감 매장의 모든 층을 구경했다. 장난감이 정말 다양했는데 특히 놀란 것은 인형이었다. 인형에게 다양한 옷과 소품을 입히고 가구, 심지어는 차도 팔더라. 현실에서도 충분히 겪을 법한 일들을 장난감으로 친숙하게 가지고 놀 수 있는 게 아닌가. 이런 장난감으로 노는 아이들의 상상력은 단조로운 장난감으로 놀던 옛날세대보다 더 대단해질 거라 생각되었다.


대형 장난감가게에서 동심여행을 하고 밖에 나오니 제법 껌껌해졌다. 동동거리는 발걸음으로 숙소에 돌아왔다. 밤거리를 걸으니 거리 곳곳에 보이는 그라피티가 더욱 섬뜩하게 다가왔다. 특히나 밤에 다시는 혼자 걷고 싶지 않더라. 내일은 아테네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아크로폴리스에 올라가서 이곳을 더 느껴봐야겠다. 첫인상은 매우 낯설고 섬뜩했다. 그리스커피맛마저 떨떠름했다. 내일은 또 어떤 감정을 가져다줄지 기대해 본다. 프라뻬 커피 맛은 참 달달하다던데 프라뻬 커피맛 같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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