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지 못할 추억
하룻짜리 집은 빨래가 잘 안 말랐다. 짐을 줄이기 위해 슬쩍 덜 마른 옷을 입었다. 가끔은 실내온도보다 내 체온으로 말리는 게 더 빠를 때가 있다. 꿉꿉한 마음이었다. 꾸역꾸역 짐을 넣으니 배낭 하나로 줄여졌다. 기적 같은 일이었다. 체크아웃을 하고 집에서 나왔다.
길을 나서자마자 조금씩 가랑비가 내린다. 허리춤에 있던 비옷을 꺼내 덮었다. 에펠탑으로 목적지를 찍고 구글맵에서 알려주는 대로 걸어가 본다. 2시간이 걸린단다. 순례길 연습도 할 겸 하루종일 걸어보기로 한다. 조금 걸었는데 벌써 무겁다. 대체 배낭에 뭐가 들었길래 무거운지 모르겠다. 앞으로 살아남기 위해 많이 버려야 할 작정이다.
그라피티가 길거리에 많았다. 흉측한 그라피티도 분명 있었다. 그래서 나에게 자꾸 의문이 들었다. 같은 그라피티인데도 유독 그리스 아테네에 대한 인상이 왜 이렇게 험악하다고 느꼈는지 말이다. 아무래도 그라피티의 비율이 더 높고, 대부분 험악해서 그런 게 아닐까. 또한 길거리에 맛있는 음식 내음도 안 나고 즐거운 노래하는 사람이 없다.
파리는 자꾸 걸음을 멈칫하게 하는 것들이 많았다. 바게트를 하나씩 품고 다니는 사람들. 빵집에 줄 선 사람들. 자전거나 킥보드 타는 사람들. 뽀뽀하는 사람들. 노래하는 사람들. 노래에 춤추는 사람들. 활짝 핀 핑크색 벚꽃 맛있는 음식 내음. 예쁘게 진열된 물건과 상점들. 멋진 그라피티. 고딕 성당. 테라스에 자리 잡고 커피를 마시는 사람들. 광장에서 스케이트 보드 타는 사람들. 공원에서 탁구 치는 아빠와 아들. 이것이 파리의 낭만인가. 오랜만에 온 파리는 특별히 무엇을 하려 하지 않아도 충분히 새로움을 발견하게 되었다.
물론 낭만만 있는 것은 아니다. 거리에서 담배 파는 흑인들. 텐트를 펴고 자리 잡은 노숙자들. 구걸하는 사람들. 한복판에 일자로 누워있는 사람. 하루하루가 그저 생존인 모습도 마주한다.
메인거리에 오니 merci가 가고 싶어 졌다. 사고 싶은 물건들을 잘 모아놓은 편집샵이다. 역시 오는 사람들이 다 멋쟁이였다. 한국인들이 어디에 숨어있었나 했더니 여기서 만났다. 다들 에코백, 모자, 팔찌 하나씩은 사더라. 파타고니아 옷이 예쁘길래 유로 환율을 검색했다가 놀랐다. 1,440원을 돌파했더라. 물건들이 반짝거렸지만 메고 있는 가방의 무게와 천장을 모르고 솟구치는 유로환율에 지갑을 꾹 닫았다.
이번에는 퐁피두센터에 가고 싶어졌다. 건물을 지탱하는 철제 기둥 구조물을 모두 외부로 설계해 독특한 건물이다. 옛날엔 퐁피두센터 쪽에 분수가 흘렀는데 보수 중이라 아쉬웠다. 퐁피두센터는 부활절 주말 마지막날이라 그런지 더 붐볐다. 유명한 전시가 열리는지 입장 줄이 길어서 들어갈 엄두도 안 냈다.
한 시간 정도 넘게 걸어와서 그런지 목이 말랐다. 맥도널드를 가려고 했는데, 가까이에 스타벅스가 보인다. 주문하려고 줄을 섰다. 내 앞사람이 그냥 얼음물을 달라고 하더라. 비용은 안 받고 주더라. 당당하게 얼음물만 주문하는 패기가 대단했다. 나는 아이스아메리카노를 주문했다. 바리스타 분 이름표에 한국이름으로도 적혀있어서, 한국을 좋아하시나 보다 싶었다. 내적친밀감이 들었다. 오래 있으려고 그란데사이즈를 시켰는데, 내부는 카공족들로 자리가 꽉 차 있었다. 앞으로는 너무 시내인 스타벅스는 가지 않아야지.
바깥 자리에 앉아서 아이스아메리카노를 한 모금 마셨다. 이번에 유럽 와서 마신 커피 중에 제일 맛있었다. 테라스 자리에 앉은 덕분에 퐁피두센터를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구경했다. 다들 길이도 길고 멋지게 입어서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했다. 딱 봐도 배낭여행하는 행색으로 파리를 돌아다니는 내가 약간 초라해질 정도였다.
스타벅스에 들어오는 사람 중에 레고 쇼핑백을 들고 있는 사람이 있더라. 구글 맵에서 레고스토어를 검색해 보니 근처에 있었다.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서 레고매장으로 향했다. 꽤 큰 레고 매장이었는데 들어가려면 줄을 서야 했다. 어린이 손님들이 많았다.
입구에 들어서니 에펠탑, 노트르담대성당, 개선문이 모두 레고로 있었다. 레고매장에 오면 파리 관광을 다 할 수 있다. 레고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이탈리아 바리, 이탈리아 토리노에 이어 세 번째 유럽 레고매장 방문이다. 이미 똑같은 레고를 여러 번 봤기 때문에, 감흥이 없었다. 그나마 프랑스 파리 특별 레고만 눈이 가더라. 진짜 사고 싶은 건 레고손목시계뿐이다. 이미 8년이 지나서 이제 단종된 것 같지만 아른거려서 계속 방문하게 된다.
원래 목적지인 에펠탑으로 향했다. 방향을 잘 몰라서 서성거리다 2024 파리올림픽 공식굿즈매장이 보였다. 슬쩍 둘러보았으나 역시 구매할 건 없었다. 원래 그냥 여행 왔으면 혹해서 살 수 있을 텐데 짐 때문에 어깨가 무겁고 유로가 비싸서 아이쇼핑만 했다.
시내에서 에펠탑을 가려면 센강 쪽으로 걸어가야 한다. 퐁네프다리 직전에 루이뷔통매장에서 아주 큰 쿠사마야요이 전시동상이 보였다. 그녀는 노란 호박에 검정땡땡이 작품으로 잘 알려진 작가다. 멀리서 보기에도 세상 화려하고 웅장해서 가까이 가서 기념사진을 남겼다. 다채로운 색감으로 붓칠 하는 모습을 표현해 두었는데 무지개색 우산을 쓴 부부가 지나가서 하나의 그림처럼 잘 어울렸다.
에펠탑 도착하기 20분 정도가 남았을까? 도미노피자가 보였다. 6유로짜리 피자를 판다고 해서 에펠탑에 가서 먹을 생각을 했다. 도미노피자 옆 마트에 가서 사이다를 샀다. 에비앙 생수가 사이다보다 더 싸더라. 왜 프랑스 사람들이 에비앙 먹는지 이제 알겠다.
도미노 피자에 들어가니 반겨준다. 6유로짜리 포스터를 가리켰더니 그건 아침한정메뉴란다. 눈앞에 보이는 팸플릿에 7유로짜리 피자를 가리켰더니 그건 내일 진행되는 프로모션 가격이란다. 메뉴판을 보고 제일 저렴한 7.5유로짜리 햄피자를 주문했다. 10분 만에 따끈따끈한 피자가 나왔다.
에펠탑 앞에서 피자 먹을 생각에 발걸음이 빨라졌다. 빼꼼빼꼼 에펠탑은 모습을 드러내더니 순식간에 도착했다. 벤치에 앉아 배낭을 풀고 피자를 열었다. 비둘기가 찾아온다. 에펠탑 비둘기는 사람을 무서워하질 않더라. 발을 세게 땅에 내디뎌 내쫓아도 기척도 안 한다. 그래서 피자 한 조각씩 비둘기 눈치 보며 먹었다. 비둘기 떼가 지나가니 이제는 에펠탑 기념품 파는 흑인이 찾아온다. 1유로 밖에 안 한다고 들이댄다. 괜찮다고 말하고 눈을 피한다. 이제 좀 자유가 찾아온 것 같았는데, 아주 빠르게 에펠탑 주변으로 먹구름이 드리운다.
재빠르게 비옷을 꺼내 입었다. 마지막 피자 두 조각은 반으로 접어 햄버거처럼 우걱우걱 먹었다. 거의 다 먹을 때쯤, 비가 와장창 쏟아진다. 샤워하듯 퍼붓는 빗줄기에 어쩔 줄을 몰랐다. 가만히 앉아서 내리는 비를 그저 맞는 수밖에. 사람들은 순식간에 비를 피해 다들 어디론가 도망갔다. 한 10분을 내리 맞았을까. 빗줄기가 잦아든다.
에펠탑이 잘 보이도록 기념사진을 찍었다. 비 때문에 지나가는 사람이 없어서 혼자 셀카를 찍었다. 팔이 짧아서 얼굴만 크게 나오고 뭔가 아쉬웠다.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사진은 제대로 남겨야 하지 않겠나. 배낭 메고 사람들 있는 쪽으로 찾아가서 사진 찍어달라고 했다. 참고로 사진은 커플한테 부탁하면 흔쾌히 찍어준다. 처음엔 쭈뼜대며 사진 찍어달라고 부탁했는데 나중엔 먼저 사진 찍어주는 여유도 생겼다.
지나가던 사람이 내 배낭커버가 내려와서 윗부분이 젖는다고 배낭커버를 조정해 줬다. 가방부피가 커서 어쩔 수 없이 젖는 걸 난 이미 알고 있었다. 남의 가방 젖을까 봐 걱정해 주는 마음씨가 고맙더라.
이제는 버스터미널로 돌아가야 할 시간. 바로 가는 버스도 지하철도 없다. 어차피 빗길에 걸어야 하는 운명. 전기자전거 100분 패스 시간이 56분이 남아있어서 자전거를 탔다. 안전하게 자전거도로를 만날 때까지 자전거를 끌고 가는데 바퀴가 굴러갈 때마다 피융피융 이상한 소리가 났다. 길거리의 사람들이 깔깔대며 웃어서 부끄러웠다.
비는 계속 왔지만 자전거도로를 타니 생각보다 수월했다. 아무래도 비가 와서 자전거 타는 사람도 걸어 다니는 사람도 적었다. 빗길 운전은 거리가 미끄럽고 물이 많아 위험해서 다시는 안 하고 싶다. 무사히 터미널에 근처에 왔다. 주차하려고 하니 이미 만차지역이라고 해서 당황했다.
어플을 보고 두 세 블록 걸어가서 주차하니 다행히 주차가 된다. 방향을 잘 몰라서 터미널 반대 방향으로 걸어갔더라. 1시간이나 일찍 도착해서 괜찮았다. 혹시 몰라 병으로 항상 부지런을 떨어서 늦는 일이 없다. 다만 이용권 시간이 모자랄까 봐 조마조마했다. 다행히 이용권 시간도 15분이나 남았더라. 전동킥보드에 도전하려 했는데 장거리고 짐이 많아서 안정적인 자전거 타길 잘한 것 같다. 한국 가면 전동킥보드를 꼭 타봐야지.
지금은 프랑스-스페인 국경지역인 프랑스의 엉데(Hendaye)로 가는 버스 안이다. 오늘을 마지막으로 당분간 야간버스는 없다. 앞으론 매일 걸어서 새로운 동네에 가볼 것이다.
내일은 엉데에서 직접 스페인 이룬(Irun)을 걸어갈 계획이다. 약 30분 정도 거리다. 걸어서 국경을 넘어본 적이 있는가. 몇 발자국 걸었을 뿐인데, 언어가 프랑스어에서 스페인어로 바뀐다. 짐이 무거워서 약간 버겁지만, 그래도 오랜만에 순례길에 설렌다. (프랑스길, 포르투갈길 이후 8년만) 북쪽길은 또 처음이라 어떤 일들이 펼쳐질지 기대된다. 부디 좋은 길에서 좋은 사람들 많이 만났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