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리 하나만 건너면 스페인

두 발로 걸어서 국경 넘기

by 탱탱볼에세이

아침에 눈을 뜨니 앙다예에 도착했다. 앙다예는 프랑스-스페인 국경에 있는 프랑스 마을이다. 다리 하나만 건너면 스페인 이룬으로 넘어갈 수 있다. 버스는 바로 그 다리 전에서 내려줬다. 사실 그것보다 반가웠던 것은 빵 냄새가 솔솔 나는 빵집 앞이라는 사실이었다.


빵집에서 빵을 골랐다. 맛있는 빵은 많은데, 먹을 수 있는 것은 하나에서 두 개 정도가 최선이라 고민이 되었다. 힘겹게 고르고 계산하는데 동전을 다 꺼내서 거스름돈이 나오지 않게 돈을 드렸다. 조금이라도 가벼우라고 10 cent를 5 cent 2개짜리로 바꿔서 가져가셨다. 프랑스 사람들은 세심하게 친절한 면이 있다. 나는 무미건조한 편인데 이런 따뜻한 마음씨를 가진 사람들을 만나면 듬뿍 따뜻함을 느낀다. 빵을 샀는데 어디서 먹을 곳이 없어 일단 음료를 사러 나서 본다.


어차피 일찍 스페인에 넘어가도 숙소 체크인은 오후 4시에나 가능해서 앙다예를 좀 더 즐길 계획이다. 20분을 걸으니 큰 리들 마트가 있다. 국경지역이다 보니 큰 트럭들이 많이 지나다닌다. 그래서 건널목을 건널 때 특히 조심해야 한다. 최대한 조심하는 편이라 모든 차가 다 지나갈 때까지 무작정 기다리는 편이다. 큰 트럭이 지나가고 승합차가 지나가는 걸 기다리는데, 승합차 운전자가 눈을 마주치고 먼저 가라고 손짓해 준다. 이런 작은 배려 하나에도 크게 감동한다. 하도 보행자 양보 없는 나라에만 있다 와서 그럴 것이다. 유럽에 오면 보행자를 먼저 배려하는 부분에서 인류애를 크게 느낀다.


어제까지 부활절 연휴여서 그런지, 초콜릿이 엄청 세일한다. 횡재다. 순례길을 걸으면 중간에 체력을 잃을 수 도 있으니 초콜릿 지참은 필수다. 그렇게 초콜릿을 담는다. 앞으로 유럽여행할 때 초콜릿은 부활절 연휴 끝난 직후에 가장 저렴하다는 걸 기억해 두시라.


계산하고 나와서 마트 입구에서 짐을 정리했다. 어제 비를 맞고 경황없이 버스를 12시간 타고 이동해서 그런지, 정신이 없었다. 이럴 때 가끔 혼자서 나만의 공간을 확보하고 차분히 돌아볼 시간이 필요하다. 배낭을 갈무리하고 있는데, 지나가던 프랑스할아버지가 내게 인사해 주셨다.


여행하는 내가 무척이나 반가웠는지 중국에서 왔냐고 묻는다. 코레(한국)에서 왔다고 답한다. 프랑스어를 조금 하냐고 물으셔서, 엉 뿌(아주 조금)한다고 말했다. 영어도 조금 하냐고 물으셔서, 엉 뿌한다고 말했다. 엉 쁘띠라는 새로운 표현도 가르쳐 주신다. 하하. 아침부터 기분이 한껏 좋으신 할아버지를 만나서 여행 잘하라고 기운을 얻었다. 이렇게 즐거운 에너지는 금세 바이러스처럼 전염된다. 정신이 없었지만, 짧은 할아버지와의 대화 몇 마디에 조금은 긴장이 풀렸다.


순례길에서는 현금을 많이 쓰게 된다. 카드를 사용할 때는 신나게 긁고, 월급날 한꺼번에 지불했다. 현금은 계속 내가 가진 잔고를 확인하게 되니까 돈을 절약하는 데는 더 좋은 것 같다. 유럽은 동전까지 있고, 단위가 크지 않아서 돈관리가 라오스, 베트남보다는 용이하다. ATM에서는 100유로, 50유로 큰돈으로 뽑아서 준다. 순례길에서는 5유로, 10유로 작은 돈이 필요하다. 큰돈을 작은 돈으로 깨는 것도 일이고, 돈을 들고 다니다가 잔돈을 잘못 거슬러 받거나 돈을 잃어버릴까 봐 조마조마하다. 옛날에 순례길 걸을 때 바지 주머니에 털레털레 지폐를 들고 다니다가 20유로를 잃어버린 적이 있어서 더 조심스럽다.


그래서 정확히 내가 쓴 돈과 가진 돈을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서 마트 옆에 있는 맥도널드에 왔다. 맥도널드는 오전 10시 30분에 열어서 개장시간에 딱 맞더라. 가장 저렴한 커피 한 잔을 주문하고, 앉아서 맥북을 켠다. 계산이 딱 맞는다. 내가 가진 돈을 명확히 아니까 안정감이 들었다. 내가 이렇게 내가 가진 것에 대해 정확히 파악이 안 될 때, 불안감을 느끼는지 이번에 처음 알았다. 이제 나의 상황을 잘 알았으니 다시 가방을 메고 나갈 시간이다. 맥도널드에 오면 앉을자리도 충분하고, 인터넷도 안정적으로 잘 연결되고, 콘센트 충전도 가능하다. 이렇게 맥도널드 내게 편안함을 주는 공간인지. 유럽에 와서 다시금 깨닫고 있다. 마치 길을 잃었을 때 마주한 나침반 같달까.


앙다예의 해변을 구경하려고 40분을 걸어왔다. 절벽이 절경이다. 짐이 무거워서 몸은 힘들었지만 아름다운 풍경을 보상받았다. 길바닥에 배낭을 내려놓고 아침에 산 빵을 먹었다. 꿀맛이었다.


멀리 고성도 하나 보인다. 알고도 안 가려고 했던 곳이니까 막상 보이니까 가고 싶다. 그래서 근처까지 가서 사진 찍었다. 아직 순례길 시작도 안 했는데 지쳤다. 이제 3시 반이 넘었으니 스페인으로 넘어가야 한다.


앙다예의 이쁜 바다가 발걸음을 붙잡더라. 공원의 애기들도 즐겁게 놀고 있어서 반가웠다. 다리 하나 넘으니 스페인 이룬이라고 쓴 표지판이 보였다. 프랑스 앙다예에서 건널 때는 다리이름이 프랑스어였는데, 건너고 나서 보니 스페인 이룬에는 스페인어로 쓰여있다. 다리 하나로 국가가 바뀐다니 신기했다.


사실 이런 경험이 처음은 아니다. 옛날에 포르투갈 길 걸을 때도 다리 하나 넘으니 포르투갈에서 스페인으로 바뀌었다. 신기한 경험은 두 번 해도 여전히 신기하더라. 유럽은 이렇게 국경이동이 쉬워서 마음만 먹으면 어디든 가볼 수 있어 좋은 것 같다.


프랑스엔 애기들이 많이 보이더니, 스페인엔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많이 보인다. 할머니, 할아버지가 많이 사는 동네를 좋아한다. 뭔가 정겹지 않나. 할머니 할아버지가 두 손 꼭 잡고 다니시는데 보기 좋았다.


무사히 첫 번째 알베르게(순례자 전용 숙소)에 도착했다. 입구에 오니 먼저 다가오셔서 잘 찾아왔다고 반겨주시더라. 기대하지 못한 마중이라 기운이 없는데도 동동 걸리며 달려가서 냉큼 건물을 들어갔다. 8년 만에 순례길 다시 스페인어를 들으니 반가웠다. 크레덴시알(순례길 여권)을 발급받고 2층 침대를 배정받았다. 기부제로 운영되어 눈치껏 비용을 지불하면 되었다. 알베르게 안내하시는 분이 바로 한국인임을 알아봐 주셔서 뿌듯했다. 한국인들이 순례길을 많이 걸어서 보통 한국인이냐고 먼저 물어본다. 친절하게 북쪽길 경로 설명도 해주시고 시설 사용법도 가르쳐주셔서 혼자인데도 전혀 불안하지 않았다.


체크인할 때 일회용 시트를 주시는데 그걸 침대와 베개에 씌우는 것부터 낯선 곳에서의 적응이 시작된다. 바로 샤워하고 짐을 정리했다. 어제 하루 야간버스를 타서 못 씻었을 뿐인데, 세상 개운하다. 오늘 입은 후드티와 기모 바지를 버렸다. 사실 얼마 전에 산 옷이라 걸으면서 고민이 되었다. 스페인 기온이 21도인 걸 보고 미련을 버렸다. 계속 들고 다니면 그게 진짜 내 발목을 잡을 것이다.


버리는 기준은 이틀에 한 번이라도 안 쓰는 물건이다.이지 않으면 순례길에서는 모두 짐이다. 짐을 버리면서 진짜 내게 필요한 것들만 남기는 것도 순례의 한 과정이라 생각한다.


빨래도 했다. 나름의 기지를 발휘해 가방끈을 빨랫줄로 활용해 보았다. 손풍기도 드라이기 대신 머리를 말려준다. 새로운 물건의 쓰임새를 발견한 순간이다. 물건이 점차 하나 이상의 기능을 하기 시작한다.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는 순례길에서 더욱이 통한다. 앞으로 내가 가진 물건의 또 다른 쓸모를 발휘하게 될지 기대된다. 그런 발견을 할 때마다 물건의 주인으로 세상 뿌듯한 것은 덤이다.


그렇게 이 공간의 주인이 되어간다. 우리 방엔 침대가 18개 정도 있는데 거의 다 독일인 아저씨들이다. 오늘은 친구 못 사귀고 혼자인 걸까 싶었다. 반갑게도 한국인 아주머니 세 분이 새로 들어오셨다. 한국말로 대화하는 게 얼마나 즐겁던지. 같이 근처 마트에 장 보러 따라갔다. 나랑 비슷하게 이미 프랑스길을 완주하셔서 이번엔 북쪽길을 걸으러 오셨단다. 주방이 9시까지만 쓸 수 있다고 해서 다소 촉박하게 움직여야 했다. 어머니들 덕분에 따뜻한 밤이 되었다. 저녁은 챙겨먹기 귀찮아서 굶을까 했는데 샌드위치 만들어주셔서 제일 맛있게 먹었다. 밤 10시가 되자마자 문을 닫고 모든 불이 꺼졌다.


내일은 알베르게에서 새벽 6시 반에 모닝콜을 해주고, 아침을 준다고 한다. 순례길을 걸으면 새 나라의 어린이가 될 수 있다. 과연 첫날은 얼마나 걸을 수 있을지. 비가 온다고 하는데 분위기에 말려서 금방 지치지 않을지. 오랜만에 오르는 순례길에 다소 긴장이 된다. 다만 완전 처음 걷는 순례길이 아니기에 조금 더 씩씩하게 걸어보기로 한다. 부엔 까미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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