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영의 인사
이룬 알베르게에서 만난 천주교도 순례자 어머니 그룹과 함께 걸었다. 숙소에서 아침을 챙겨주셔서 든든히 먹고 출발할 수 있었다. 여름철이라 해가 늦게 뜨고 늦게 진다. 덕분에 아직 해가 뜨지 않은 시간 조심스레 해가 떠오르는 모습을 보며 하루를 시작할 수 있더라. 이렇게 걸으면서 해 뜨는 걸 본 지가 언제인지.
다시 순례길을 걷게 될 줄 몰랐다. 그것도 북쪽길을. 분명한 것은 8년 전 걸은 산티아고 순례길 프랑스길과 포르투갈길의 경험이 좋았기 때문이 또 올 수 있었다. 같이 걷는 어머니들도 3년 전 프랑스길을 걸으셨다고 한다. 코로나 직전에 걸었던 순례길이 너무 좋았어서 까미노 블루를 앓다가 이번엔 북쪽길에 오시게 된 거다.
순례길은 그렇게 사람들이 찾아온다. 각자의 짐을 짊어지고 모두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를 향해 걸어간다. 우리의 순례길로의 컴백을 하늘도 반기는 것일까. 첫날부터 비가 억수로 왔다. 덕분에 정말 빗물에 샤워라도 하듯 듬뿍 맞았다.
14명만 잘 수 있는 알베르게에 낮 12시에 일찍 도착했다. 오후 4시에나 숙소가 열리기 때문에 문 앞에 짐을 두고 밥을 먹으러 갔다. 한 접시에 담긴 고기부터 감자튀김, 빵까지 아주 황송한 점심이다. 갓 나온 따끈따끈한 음식이 세상에서 제일 맛있음을 경험한다. 비를 쫄딱 맞고 축축한 몸을 잠시 따뜻하게 녹일 수 있는 이 공간에 감사하다.
식당의 현지인들은 딱 봐도 순례자 행색인 우리 그룹에 관심 가져 주더라. 무지개색으로 브릿지 염색한 멋진 할머니는 일본어로 말을 걸어주셨다. 한국인이라고 하니 다시 한국어로 하고 싶은 말을 번역해서 대화를 시도하셨다. 맛있게 먹고 순례길 잘 걸으라는 격려였다.
그 마음이 고마워서 우린 함께 기념사진을 남겼다. 이메일주소를 물어보고 보내드리겠다고 했다. 감사합니다를 한국어로 물어보셔서 더욱 감동적이었다. 먼저 가시면서 “아디오스”라고 작별인사를 했다. 여긴 바로크지역이라 바스크식으로 말해야 한다며, 작별인사를 알려주셨는데 까먹었다. 찾아보니 “아구르”네.
할머니와 대화한 덕분에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길거리엔 바스크 지방 깃발이 여기저기 펄럭였다. 바스크 지방 독립을 염원하는 벽화도 보였다. 바스크 치즈케이크를 먹어봐야겠단 즐거운 계획도 생겼다. 앞으로 가는 산세바스티안도 바스크지방이라 바스크어로 도노스티아로도 불린다고 한다. 내일은 사람들에게 바스크어로 인사를 건네어봐야지.
첫날부터 비를 맞아서 그런지, 짐의 무게는 잠시 잊혔다. 가야 할 곳이 있고, 비가 와도 걸어야 한다는 마음이 기어코 발을 움직이게 한다. 지금 메고 있는 배낭이 무겁다면 덜어내면 되는 것이다. 순례길은 그동안 너무 많은 것을 짊어지고 살지 않았나 돌아보게 만든다. 그리고 덜 필요한 것을 끝내 내려놓게 한다.
오늘은 물기를 흠뻑 머금고 축축해진 실내슬리퍼를 버렸다. 대신 크록스를 신었다. 비 오는 날 운동화 보호를 위해 신발 커버를 씌워봤다. 한번 신었는데 벌써 구멍이 났다. 신발 커버도 버렸다. 지퍼를 제대로 안 채워서 결국 운동화도 젖었다. 조만간 구멍 뚫린 운동화도 버리고 크록스를 신고 걸을 생각이다.
이것저것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3개의 신발로 출발했지만, 결국 하나로도 충분함을 가르쳐준다. 혹시 그동안 가지고 있어도 계속 새로운 것을 원하고 결국 사게 되지 않았는가? 이미 가진 것에 소중함을 일깨워보는 게 어떨까. 우리는 가진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할 수 있으니 말이다.
이층 침대 2층이라 하늘이 보이게 뚫린 천장을 보며 눈을 감는 밤이다. 그저 따뜻한 물에 몸을 씻고, 푹신한 침대에 몸 누일 곳이 있어 감사한 하루. 내일은 배를 타고 건너편 마을로 넘어간다. 오늘보다 비가 더 많이 온다는데 또 걸어보자. 끝내 가야 할 목적지가 있으니 말이다. 부엔 까미노! (좋은 길이라는 뜻으로, 순례자를 만나면 서로에게 건네는 인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