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례길 3일 차: 시에스타 절대 지켜

스페인에 있다면 적응이 필요한 문화

by 탱탱볼에세이

새벽 6시 반. 아직 해가 채 뜨지 않은 시각. 숙소에서 1등으로 길을 나선다. 헤드랜턴의 쓸모가 이제야 발휘된다. 시야가 잘 안 보이고 컨디션이 제일 좋은 이른 아침에 걷는 게 가장 빠르게 걸을 수 있단 어둠이 무서워 서두르기 때문이다.


일찍 걷기 시작한 덕분에 새로운 마을에서 아침을 먹는다. 마을을 만나자마자 보이는 큰 빵집에 걸음을 멈추었다. 바스크 지방 사람들은 바스크 지역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하다. 바스크 지역 깃발이 꽂아진 파이 하나에 카페라테를 주문했다. 맛있는 맛인데 맛을 음미할 새도 없이 흡입하듯 먹었다. 역시 시장이 반찬이다.


지금이 우기라 그런지 비가 계속 내린다. 조끼를 걸치고 잠바를 입고 배낭을 메고 우비를 덮는다. 비는 그칠 줄 모르고 발걸음에 맞춰 추적추적 내렸다. 궂은비에 어쩔 줄 모를 땐 걸음이 빨라진다. 비를 길에서 쫄딱 맞기 싫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중간중간 발걸음을 멈추게 하는 것들이 있다. 바로 양, 소, 말이다. 광활한 초록 잔디가 깔린 땅에 그들이 있다. 풀 뜯어먹는 것을 지켜보고 있으면 그저 건강하게 자라다오를 응원하게 된다. 계속되는 비에 지쳐가는 심신에 조그만 여유를 가져다준달까.


거의 마지막 마을 도착하기 전에 귀여운 말이 우리를 반겨주러 뛰어왔다. 물론 철 울타리가 쳐져서 사회적 거리는 유지된다. 울타리 사이로 빼꼼 얼굴을 내밀고 얼짱 각도를 보여주었다. 사진 찍자는 우리의 요구에 순순이 응해주는 팬 서비스. 덕분에 지친 순례길에서 힘을 얻었다.


중간에 잠깐 해가 떴지만 대체로 계속 비가 적게 내렸다가 많이 내렸다가 줄타기를 하며 순례길을 따라다닌다. 비라도 좀 안 오면 괜찮을 거 같은데 아직도 순례길을 적응 중이다. 비를 맞으면 몸이 너무 무겁다!


오늘 머무는 알베르게는 기차역사를 개조한 공립숙소로 로 8유로다. 특이하게 인포메이션에서 등록을 할 수 있게 운영되고 있었다. 알베르게에 바로 들어갈 수 있다는 희망을 품고 마을에 도착했는데, 다시 인포메이션으로 가야한다니. 오후 2시에 인포메이션 앞에 도착했더니 오후 2시부터 4시까지 시에스타로 휴식시간이란다.


직원이 알베르게 앞에서 4시까지 기다렸다가 바로 등록하라고 알려주길래 다시 숙소를 찾아갔다. 밖은 너무 추웠고 이미 도착한 순례자가 문을 열고 나오길래 따라 들어가서 자리를 잡았다. 샤워까지 하고 상쾌한 마음으로 시에스타가 지나고 등록 가능한 오후 4시를 기다렸다.


알고 보니 다시 인포메이션에 가서 등록해야 했다. 꽤 많은 순례자들이 우리랑 같은 상황이라 얼른 인포메이션으로 향했다. 인포메이션과 알베르게는 5-10분 거리다. 급하게 걸어가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리는데, 순례자에 대한 배려가 너무 부족한 구조라 당황스러웠다. 순서대로 침대를 배정해 줘서 배정받은 침대로 다시 짐을 옮기는 해프닝이 생겼다.


하루종일 비 맞고 20km 넘게 걸으니 몸이 완전히 지쳤다. 먼저 따뜻한 곳에 들어와서 샤워라도 할 수 있어 좋았다. 이성을 잃어서 체크인 없이 먼저 숙소에 들어가 버렸지만. 시에스타에도 체크인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주길 바랄 뿐이다.


오늘 숙소는 56개 침대가 있어 조금 걱정이 덜 했다. 하지만 매일 아침부터 불안한 마음을 안고 길을 나선다. 순례길에서도 빨리 숙소 도착하기에 은근한 신경전이 생긴다. 숙소에 잘 곳이 없을까 봐 불안하기 때문이다. 북쪽길의 인기에 걸맞게 침대가 넉넉한 숙소가 늘어나야할 것이다.


저녁도 오후 8시부터야 먹을 수 있다고 해서, 또띠야로 간단하게 카페에서 끼니를 해결했다. 불가피하게 빵이나 계란말이처럼 간단하게만 먹고 있다. 순례자메뉴나 오늘의 메뉴를 먹고 싶은데 타이밍을 잡기 쉽지 않더라. 흑흑. 확실히 인프라가 잘 갖춰진 프랑스길에 비해 포르투갈길, 북쪽길은 인프라가 부족하다. 그것마저 순례의 일부라고 생각한다지만, 그래도 나는 아직 배가 고프다! 앞으로 걸으며 마주할 맛있는 식사를 기다린다.

시에스타를 절대로 잘 지키는 이 나라. 나도 얼른 순례길에 적응해서 시에스타를 즐기는 순례자가 되어야지. 제발 비만 그쳐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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