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례길 5일 차: 드디어 햇빛, 첫 순례자메뉴

쨍하고 해 뜰 날

by 탱탱볼에세이

처음으로 우비를 가방에 집어넣고 마음 놓고 걸었다. 비가 안 오니 발걸음이 가볍다. 어제 같은 숙소에서 묵었던 스페인친구 에두도 함께 걸었다. 알고 보니 나랑 동갑이더라.


3년 전 프리미티보 길을 걸었던 기억이 좋아서 이번엔 북쪽길을 걷게 됐다고 했다. 나도 8년 전 걸은 프랑스길과 포르투갈길이 좋아서 다시 오게 됐다. 북쪽길을 걷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첫 순례길이 아니다. 아무래도 북쪽길은 산이 많고 바닷바람도 거세기때문일 것이다. 예전에 다른 순례길을 걸어봤다고 해도 길은 여전히 똑같은 무게로 힘들다.


화창한 날씨 덕분에 테라스 자리에서 카페라테를 한잔 마셨다. 감기 걸려서 목구멍이 아픈데 따뜻한 라테를 마시니 기운이 난다. 타이레놀보다 라테 한 잔이 효과가 좋았다.


스틱 2개를 양쪽에 꽂고 걸으니 마치 스키를 타는 기분이 들었다. 크록스를 신고 걸어서 아직 땅이 빗물에 마르지 않은 곳이 많아서 여러 번 미끄러졌다. 진흙에 철퍼덕 넘어졌는데 오뚝이처럼 바로 일어났다. 미끄러지면 민망하기 때문이다. 흙이 듬뿍 바지에 묻고 양말이 축축해졌지만 그래도 길을 쉼 없이 이어나갔다. 오늘도 가야 할 길이 있으니 걸음을 멈출 수 없다.


점심은 게르니카에서 순례자메뉴를 먹었다. 11유로에 파스타부터 스테이크, 아이스크림까지 처음으로 배부르게 식사를 할 수 있다. 음료는 따로 주문해야 했지만, 물은 가득 채워주셨다. 순례길을 위한 개인물병에도 물을 채워주셔서 감사했다. 보통 프랑스길에서는 와인 한병도 포함되어 순례자메뉴를 더욱 풍부하게 즐길 수 있다. 와인이 포함된 순례자메뉴를 만나길 기다려볼 테다.


레스토랑을 나와서 피카소의 게르니카 벽화를 보려고 서성이고 있는데 스페인 할머니가 먼저 말을 걸어주셨다. 시청 간다고 하니까 길을 친절히 알려주셨다. 왜 가냐고 물어보시며 벽화 보러 간다니까 다시 길을 알려주시더라. 진짜는 마드리드에 있는데, 그래도 보러 갈 거냐고 물어보셨다. 덕분에 길을 헤매지 않았다. 길거리에 누가 헤매고 있으면 먼저 도와주려는 할머니의 여유를 닮아야지.


하루종일 걸어서 여러 산을 넘었는데, 날이 좋아서 풍경이 유독 멋졌다. 자전거 타는 그룹도 많더라. 길거리에 말을 타는 부녀도 있어서 반가웠다. 모르는 이와 눈 마주치고 반갑게 인사해 본 적이 있는가? 순례길에서는 참 자연스럽다. 길에서 만나면 누구든 “올라”라고 처음 본 사이임에도 간단하게 서로 인사를 주고받는 순간이 가장 즐겁다. 순례길은 역시 아름다운 자연과 아기자기한 마을 사람들 만나는 맛이지!


오늘 숙소는 저녁도 주고, 아침도 준다. 식사 포함 30유로다. 이 길을 걸어온 순례자끼리 다 같이 앉아 함께 밥을 먹으니 더 맛있다. 이건 순례길에서만 가능한 시간이다. 서로 잘은 모르지만 동질감이 느껴져서 애틋하다. 이 길을 선택해서 찾아오고 발이 아파도 배낭이 무거워도 그저 노란 화살표 따라 산티아고까지 걷는다는 것 자체가 끈끈하게 만드는 것이다.


비가 그치고 나서야, 내가 원한 순례길을 만났다. 앞으로 일주일은 비가 안 온다고 하니 더 순례길을 만끽해 볼 작정이다. 목적지를 멀리 정해놓고 급하게 걷기보다는 느리지만 음미하면서 걸어보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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