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례길 7일 차: 도시의 맛

등산화를 사다

by 탱탱볼에세이

바스크 지방의 주도인 빌바오에 무사히 도착했다. 오늘은 걸어오면서 스페인 친구 대니랑 이야기를 했는데, 전자통신공학 대학강사였다. 온라인근무를 해서 화, 목, 일요일만 저녁에 4시간씩 강의를 한단다. 순례길 여행과 일을 병행하다니 대단하게 느껴졌다. 대니는 첫 까미노인데도 고수처럼 나무 지팡이를 짚고 다니고, 샌들을 신고, 가방도 매우 가볍다. 3주 정도 걸었는데, 이미 물집도 모두 이겨내서 아주 평온한 상태였다. 이후엔 스케줄 때문에 산탄데르까지만 갈 수 있을 거 같다고 아쉬워했다.


짐이 무거워서 짐이 되는 물건을 버리다 보니 비에 젖고 구멍 뚫린 운동화를 버리게 되었다. 크록스로 며칠을 걷게 됐는데, 추천하지 않고 싶다. 순례길이 고행길이 된다. 순례길을 즐기기 위해서, 빌바오에 오자마자 데카트론으로 향했다. 빌바오 데카트론은 3층 규모로 내가 가본 데카트론 중에 제일 컸다.


원래 저렴한 데카트론 브랜드 등산화를 사려했다. 그러다가 이름 있는 콜롬비아, 머렐, 살로몬을 차례대로 신어보니 발에 착 감기는 느낌이 확실히 다르더라. 한번 비싼 등산화를 신어보니, 저렴한 등산화는 성에 차지 않았다. 유로가 또 1,450원 대를 달리고 있어서 슬펐지만, 그래도 10년 신을 생각으로 발에 잘 맞는 등산화를 샀다. 앞으로 이 등산화 신고 좋은 데 더 많이 다녀야겠다.


비 바지와 등산양말도 구매했다. 다음 주에 또 비 온다고 하니 겁이 난다. 신발을 잘 비로부터 보호해야 하는 덴 비 바지가 제 격이라고 같이 순례길을 걸으시는 분이 알려주셔서 나도 구매했다. 순례자들은 효율적인 물건이 많다. 짐을 가볍게 하기 위해 최대한 필요하고 유용한 물건만 가지고 다니기 때문이다. 덕분에 순례자를 만나면서 각자 나름의 생활의 지혜를 많이 배운다. 쇼핑을 마치고 마음의 짐을 내려놓았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니, 데카트론 입구에 정수기가 있더라. 물병에 물을 가득 채웠다. 마음이 든든해졌다. 드디어 순례길을 위한 준비를 제대로 한 기분이다.


데카트론 바로 근처에 메뉴 델 디아를 하는 곳이 있어서 고민 없이 들어갔다. 순례길에서 처음으로 메뉴 델 디아를 먹을 수 있는 시간이 찾아왔다. 평소라면 안 먹을 음식들이지만, 저렴하게 끼니를 든든하게 해결할 수 있어서 스페인의 메뉴 델 디아를 사랑한다. 가지조림, 생선구이, 치즈케이크까지 10유로에 즐길 수 있었다. 와인이 포함된 메뉴 델 디아도 있는데, 내가 간 곳은 물 한 병만 포함되었다. 와인이 포함된 메뉴 델 디아를 만나길 또 기다려야지.


사실 숙소도 데카트론과 가까운 곳에 잡았다. 빌바오는 구겐하임 미술관이 유명하지만, 나는 데카트론을 위해 왔다. 참고로 구겐하임 미술관은 영국 대영박물관,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유럽의 3대 박물관이다. 숙소가 시내 중심이라 여기저기 다니기 좋다. 프라이막과 파이브가이즈 버거가 바로 코 앞이다. 프라이막은 의류계의 다이소 답게 여전히 저렴하고 품질 좋은 옷들이 많더라. 프라이막은 와이파이도 무료로 제공해서, 더 반가웠다.


숙소 체크인 시간에 맞춰서 들어왔다. 침대가 1번이길래 이 층침대에서 1층인 줄 알고 행복했다. 막상 방에 들어가니 2층이더라. 좌절. 그래도 엊그제 만난 한국인 아저씨가 같은 방이라 반가웠다. 순례길을 걷고 있으면, 결국에 순례자들은 다시 만난다. 그래서 나는 순례자와 헤어질 때 크게 아쉽지가 않다. 만날 인연이면 다시 만나기 때문이다.


얼른 빌바오 구겐하임 박물관에 다녀와서 잠들어야겠다. 빌바오는 제조업, 서비스업이 전반을 차지하는 도시였는데 구겐하임이 들어서고부터 서비스업이 전반을 차지하는 체질 개선에 성공했다고 한다. 쇠퇴한 제조업 도시의 누명을 멋진 랜드마크로 깔끔히 벗어던진 것이다. 그래서 이번엔 구겐하임 건물만 봐도 첫 빌바오 방문은 성공했다고 생각한다. 도시의 맛은 달콤하지만, 하루로 충분하다. 중독적인 도시의 맛에 더 길들여지기 전에 얼른 도시를 떠나야지. 무엇보다 새로운 등산화 신고 순례길 걸을 생각에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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