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례길 13일 차: 기찻길 따라

발목 보호의 날

by 탱탱볼에세이

산탄데르 은행밖에 모르지만 산탄데르에서 하루를 지냈다. 체력이 없어서 시내 구경은 못 했지만 아침에 수수료가 적은 은행 atm 찾는다고 iber caja를 찾아갔다. 저번에 그리스에선 인출수수료를 5유로 이상 냈는데, 덕분에 스페인에서는 수수료를 안 내서 신기했다. 유로가 많이 올랐는데 인출수수료라도 아껴서 그나마 마음이 놓였달까.


순례길로 합류하려고 구글맵을 켜고 걸었다. 스페인 할아버지가 순례길 블록에서 다음 블록을 걷고 있는 나를 보더니 쫓아와서 순례길로 데려다주셨다. 순례자인 것 같은데 순례길 찾고 있는 것 같아 보여서 내가 왔다. 대충 이런 뜻인 것 같은 스페인어를 늘어놓으셨다. 원래도 친절한 사람들이지만 특별히 순례자에게는 세상 친절한 스페인사람들을 만난다. 순례길은 몸은 힘들지만 마음이 힘들지 않은 이유다.


순례길이 대도시를 통과하면 차들이 즐비해서 사실 매우 걷기 불편하다. 하지만 매번 자연경치만 보이는 조용한 길만 걷을 수만은 없는 법. 어떤 길이든 그저 받아들이고 걸음을 이어간다.


본능적으로 아픈 물집이 있는 부분은 딛지 않고 싶어 해서 걸음이 누가 봐도 이상하다. 삐그덕거린달까. 정상적으로 걷고 싶지만 달리 방도가 없다. 뒤에서 보고 처음 본 순례자들이 다리 괜찮냐고 도움이 필요하냐고 묻는다. 그런 관심 자체가 힘이 된다. 괜찮다고 물집 때문이라고 답한다. 아무도 어떻게 할 수 없다. 내 힘으로 나의 걸음을 계속 가는 수밖에. 힘들어도 스틱을 두 발 삼아 네 발로 걷는다. 하도 힘주어 며칠을 걸었더니 발목도 다리근육도 엉망이다. 그래서 오늘은 15km만 걸었다.


중간중간 기찻길을 건너야 해서 더 조심스러운 하루였다. 프랑스길에서는 딱 한번 등장하는 기찻길인데, 북쪽길은 엄청 많다. 심지어 내일은 지나가는 다리가 막혀서 기차를 타고 마을 하나를 통과해야 한다고 한다. 순례자들과 친해져야 하는 이유다. 전혀 정보를 몰랐는데 기웃거리다가 누가 기차시간표 사진 찍고 있길래 알게 됐다.


숙소에 오후 1시에 도착했다. 체크인 가능시간이 2시 30분이라 1시간 30분 동안 먼저 도착한 독일인 3명이랑 이야기를 나눴다. 다들 프랑스길의 기억이 좋아서 다시 또 북쪽길을 걸으러 왔더라. 여기 숙소는 침대를 고를 수 있었는데 젊으니까 2층을 써야 한다고 한다. 가장 먼저 도착한 케이티도 31살로 우리 둘이 젊은이였는데 2층에 자리 잡아야 했다. 젊어서 2층을 쓰다니 억울하다. 하지만 좀 더 생각해 보면 1층에 누워있는데 어르신들이 2층에 올라가는 모습을 보고 있는 게 더 불편하긴 하겠다.


순례길은 이렇게 모든 것이 다 내 맘대로 할 수 없다. 그저 걷는 것과 어디까지 걸은 지만 선택할 수 있을 뿐. 하지만 그렇게 선택에 따라 어떤 순례자와 숙소에서 시간을 보낼지 운명이 결정된다. 길에서나 지난 숙소에서 만난 사이를 다시 만날 때 반갑다. 마치 운명 같다. 사실 같은 길을 걷고 있으니 어찌 보면 다시 만나는 게 당연한데도 말이다.


오늘도 걷다가 클라우스와 요셉 오스트리아 할아버지들을 다시 만났다. 내 생일에 같이 식사한 분들이다. 클라우스가 내게 티트리오일 치료를 해줘서 길에서 만나서 더 반가웠다. 함께 조금 걷다가 다음에 또 만나자고 먼저 떠나보냈다. 오늘따라 걸음이 무겁고 발목이 아파서 중간중간 걸음을 멈추고 땅을 봤다.


오전에는 비가 조금씩 와서 또 하루종일 비 오나 슬쩍 걱정했다. 다행히 체크인하고 완전히 그쳐서 손빨래해서 모두 햇빛에 말렸다. 오랜만에 햇빛을 쬐며 숙소에 가만히 앉아있는 걸로도 좋더라. 처음으로 순례길에서 머리를 햇빛에 말려보다니.


여긴 저녁식사를 11유로에 차려준다. 와인을 즐기진 않지만 순례길 와인은 꼭 챙겨마신다. 메뉴에 포함되었기 때문이다. 레드와인과 화이트와인을 스페인어로 말할 때 헷갈리긴 했지만 호호. 노 비노 노 까미노다.(와인이 없으면 순례길이 아니다.) 식사하면서 서로 산티아고 맛집을 공유했다. 산티아고 가면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 있는 기대감에 부푼다. 물론 1달 뒤지만.


오스트리아인 친구가 옷걸이를 챙겨 왔냐고 물어본다. 챙겨 왔다고 말하며 하나 선물로 줬다. 그랬더니 순례길 배지를 선물로 받았다. 순례자아이템을 나누다니 더 뜻깊어졌다. 순례길은 길도 길이지만 결국 함께하는 사람들로 기억된다. 내일도 20km만 걸을 것이다. 이제 물집은 익숙해졌고 발목통증이 좀 괜찮아져서 내 템포를 찾으면 좋겠다.


네덜란드 친구가 산탄데르에서 출발하기 전에 다음 마을까지 걷는다고 알려줬다. 나는 조금만 갈 예정이라고 컨디션 봐서 조금만 걸으라고 했다. 그녀는 어차피 우린 다시 만날 거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너랑 나의 템포는 다르지만 언제나 넌 내가 가는 곳에 있더라라며. 남들보다 힘들게 가는 길을 알아봐 주는 순례자 친구들이 있어 좀 더 힘을 낼 수 있는 게 아닌가 싶다. 서두르지도 무리하지도 않고 차근차근 나의 템포로 가되 멈추지 않겠다고 다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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