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우디의 첫 번째 건물
아침에 숙소에서 블랙커피 한 잔에 바나나를 먹고 출발했다. 바다 근처 마을로 가는 길이라 해무가 길에 많이 껴서 더욱 신비스러웠다. 순례길은 다들 다른 템포로 걸어서 만나는 사람도 자주 없고 같이 걷는 사람도 없다. 그래서 보통 혼자 걷게 된다.
길을 걷다가 누군가를 만나면 무조건 인사를 건넨다. 인사한 미화원아저씨가 자기 핸드폰 카메라가 안된다고 해서 다가갔다. 신분증을 찍어야 하는데 후면카메라 초점이 망가졌더라. 아이폰도 삼성도 아니고 중국 화웨이폰이었다. 전면카메라로 앞뒷면을 사진 찍고 신분증만 보이게 잘라드렸다.
이렇게 스페인어를 전혀 몰라도 소통이 되고 문제가 해결이 되는 걸 보면 신기하다. 마음이 통하는 걸까. 웬일로 내가 남을 도왔다. 아침부터 작은 일이지만 해결이 되어 내가 다 속이 시원하더라.
15km 정도 거리라서 즐거운 마음으로 가뿐히 오늘 머물 마을에 도착했다. 숙소 체크인 시간보다 2시간 빨리 도착했더라. 숙소 가는 길목에서 영국인 마크를 만났다. 영국인이라 그런지 처음 보는데도 유창한 영어로 말을 잘 걸더라.
가우디가 건축한 첫 번째 건물이 이 마을에 있다고 내가 귀띔했다. 체크인 시간이 남았고 본인도 가우디를 좋아하니 한번 가본다고 한다. 나도 숙소 들어가서 씻으면 밖에 나오기 귀찮으니까 따라갔다. 가우디 건물 바로 앞에 바가 있어서 일단 갈증을 해결했다. 맥주 한 잔에 걸은 피로가 녹는다.
가우디 건물을 갔는데 매표소 입구랑 건물이 다소 거리가 있어서 안 보이더라. 입장료가 7유로인데 즐기기엔 짧은 시간이라서 일단 돌아섰다. 숙소 체크인 시간에 맞춰 돌아갔다.
벌써 누가 한 명이 앉아있다. 스위스에서 온 아주머니였다. 예약했냐고 물었더니 예약했단다. 나 빼고 다 예약하고 온 것 같아 불안했다. 예약한 친구들이 너 일찍 왔으니까 자리 있을 거라고 말해줬지만 실제가 어쩔지 모르니 걱정됐다.
우리 바로 뒤에 도착한 독일인 아저씨도 예약했더라. 헉 나 자리 없는 거 아닌가 싶었다. 실제로 체크인 시간에 숙소 문이 열여서 물어보니 자리가 이미 다 차버렸다. 다행히 독일인 아저씨가 4자리 예약했는데 1명이 순례길 중도하차해서 1자리가 빈다고 했다. 이게 웬 떡이람. 감사하다고 여러 번 말했다.
유심을 전화통화 안 되는 유심으로 샀는데, 다음부턴 전화되는 유심을 사야겠다. 다들 알베르게를 예약할 수 있으면 미리미리 예약하더라. 나는 순례길의 매력이 어디 마을에서 멈출지 미리 정하지 않고 출발하는 데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사람이 점점 많아지는 길의 유행 때문에 예약은 필수사항이 되었다. 만약에 취소자리가 없었다면 다른 숙소를 찾느라 한참을 방황했을 일이다.
오늘 숙소는 22유로인데 완전 신식이다. 모두 다 새것이라 순례길숙소 같지가 않다. 따뜻한 물에 샤워를 바로 했다. 씻으면서 옷도 빨래하는 새로운 스킬을 순례자들에게 배워서 처음 시도해 봤다. 따로 빨래에 시간을 쓰지 않아도 되어서 편하더라. 다만 갓 체크인시간에 도착한 오늘처럼 사람이 붐비지 않을 때만 가능하다.
빨래를 널려고 테라스로 향했다. 아까 나를 도와준 독일아저씨가 저기 탈수기 있다고 쓰란다. 탈수기까지 있는 숙소라니. 운이 엄청 좋은 날이다. 열심히 탈수기가 물을 흠뻑 짜주는 게 웃겼다. 내가 빨래한 걸 그대로 말렸다면 물을 많이 머금고 있어 하루종일 걸리고 다 안 말랐을 것이다. 물 한 통이 금방 가득 찰 정도로 성능이 좋더라. 역시 기계가 최고다.
뒤에 도착한 어떤 여성분이 셋이서 방을 쓰는데 2층이 쓰기 싫다고 1층에 있는 내 자리랑 바꿔달라고 물어보셨다. 난 1층에 있는 방 2층침대의 아래침대고 아줌마는 2층에 있는 방 싱글침대 3개 중 하나였다. 금액 차이도 없고 아무리 봐도 내가 바꾸는 게 이득이라 왜 바꾸길 원하냐고 물어봤다. 2층 쓰기 싫다고만 말씀하셨다.
바꿔서 올라오니 더 넓고 싱글침대에 3명 이서만 쓰는 방이라 더 쾌적했다. 아까 우리보다 먼저 도착한 스위스 아주머니랑 새로 보는 네덜란드 아주머니가 하루 룸메이트가 되었다. 나이 얘기가 자연스레 나와 알게 된 것은 엄마랑 동년배셨다. 이 층침대가 아니라 커튼은 없지만 엄마들이랑 하루 같은 방에서 자는 것도 나쁘지 않지. 자리 바꾼 아주머니랑 두 분이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난 운이 좋았다.
탈수기도 있고 빨래를 널 곳도 충분해서 입은 옷을 재외하고 모든 옷을 빨았다. 보통 빨래터의 물은 차가운 물만 나오는데 여긴 따뜻한 물이 빵빵하게 나왔다. 숙소마다 시설차이가 하늘과 땅 차이라서 이런 사소한 차이 하나에도 감동을 먹는다. 순례길이 아닐 때는 손빨래를 안 해서 탈수기가 전혀 필요 없지만 성능이 너무 좋아서 탐나더라. 모든 숙소에 탈수기 한 대쯤 있으면 좀 더 평온할 것 같다.
네덜란드 아주머니랑 가우디건물에 다시 가보기로 했다. 이따금씩 순례자 할인이 되는 곳도 있다며 순례길 여권도 챙겨갔다. 숙소에서 5분 거리라 더 여유롭다. 별도로 할인되는 건 없지만 가우디의 처음이 궁금해서 돈을 내고 들어갔다.
햇빛이 잘 들게 햇빛을 잘 머금도록 설계한 건물이었다. 벽에는 해바라기를 손으로 그린 타일이 멋있게 붙여져 있더라. 그리고 건물 가운데는 온실로 꾸몄다. 가우디는 처음인데도 이렇게 완성도 있는 작품을 만들다니 분명 천재일 것이다. 여기저기 구경하며 감탄을 연발했다. 7유로가 아깝지 않을 만큼 대단했다.
부엌이 엄청 크고 식기구가 잘 준비되어 있어서 가우디건물 다 보고 근처 큰 마트에 장을 보러 갔다. 네덜란드 아주머니는 비건이라 고기는 생선만 드신단다. 음식취향이 맞으면 같이 장 봐서 비용을 나누는 게 이득이다. 난 완전 고기 파라 따로 장을 봤다. 쌈장은 없지만 흰 쌀 밥에 삼겹살을 구워 먹고 싶었기 때문이다.
ㅋ오랜만에 한국스러운 밥을 저녁으로 먹었다. 뜨거운 물이 콸콸 나오고 빨래 물을 빼 줄 탈수기가 있고 저녁도 직접 요리할 수 있는 부엌도 있다니. 심지어 내일 아침도 준다. 숙소도 관광도 식사도 대단히 만족스러운 하루였다. 순례자에게 이보다 더한 행운이 어디 있을까. 잘 곳이 있고 밥 먹을 곳이 있으니 그걸로 되었다. 오늘의 럭키데이를 잊지 말아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