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례길 20일 차: 비야비시오사

윙가디오레비오싸

by 탱탱볼에세이

든든하게 아침을 먹고 출발했다. 땅바닥에서 하루 자니 뭐든 소중하게 다가온다. 푹신한 침대, 따뜻한 실내, 뜨거운 샤워, 풍부한 저녁. 어쩌면 일상 속의 소중함을 일깨우려고 온 길일지도 모르겠다. 너무나 따뜻한 노부부의 환대를 받아서일까. 평소보다 활기찬 아침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오늘도 엄마 크리스티나 아들 이타와 함께 걸었다. 우연하게 성당 바닥 동지들이 걷는 템포까지 맞다니. 우린 매우 느리다. 까미노에서 제일 느리게 걷는 사람들이다. 모두가 우릴 앞서가니까. 다리가 긴 순례자들을 부러워하지만 우린 멈추지 않고 우리의 템포로 간다.


크리스티나가 발 근육이 많이 뭉치고 물집 때문에 힘들어했다. 조금이나마 상황을 바꿔보려고 신발 깔창을 샀다. 훨씬 도움이 된다고 했다. 하지만 매일 오래 걸어야 하는 순례자는 매번 새로운 통증으로 아프다.


그래도 이게 순례길이니 받아들이고 걷는다며 투지를 불태운 그녀. 나도 비슷하게 한계에 부딪힐 때 끙끙대는 얼굴을 해봤기에 그것을 내리 견뎌내는 한걸음 내딛는 그녀가 멋져 보였다. 제일 힘들어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야비시오사까지 우리 모두 무사히 왔음에 감사했다. 윙가디오레비오싸랑 비슷한 발음이라고 주문을 외우면서. 계속 걷다 보면 힘들어서 정말 아무 말이나 하게 된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고서야 가족의 소중함과 시간이 유한함과 중요성을 깨달았다고 크리스티나와 이타에게 말했다. 지금의 시간은 다시 오지 않는다며 둘이 함께 걸은 길을 잊지 못할 거라 덧붙였다. 저녁엔 행복하게 맥주도 마시고 푸짐한 메뉴 델 디아도 먹었다. 시큼한 사과향인 나는 화이트와인도 곁들였다. Sidra라고 아스투리아스 지방 특산품이라 했다. 그 어느 곳보다 평화로운 시골마을 지역이라 나는 신토불이 느낌 나서 이 지방이 마음에 든다.


이제 이타와 크리스티나는 까미노 여정을 끝내고 내일이면 오비에도로 간다. 아스투리아스 지방의 수도인 오비에도에서 하루 묵고 다시 산 세바스티안으로 돌아간다고 한다. 같이 다닌 지 고작 2일이지만 그새 정이 많이 들었다. 아무래도 땅바닥에서 같이 잠든 사이라 그런가.


언젠가 엄마와의 까미노를 계획하는 내게 좋은 본보기가 된 두 모자. 사실 크리스티나는 이타의 새엄마인데, 이타가 8살 때 아빠가 크리스티나랑 재혼해서 같이 살게 됐다고 한다. 21살이 된 이타는 친엄마보다 더 많은 시간을 새엄마랑 함께한 것이다. 3년 전에 처음 크리스티나랑 같이 까미노를 걷기 시작했다고 하는 이타. 그가 진솔하게 자신의 가족사를 이야기해주고 한국문화를 좋아해서 더 금방 친해질 수 있었다.


내일부터 험난한 산길이 기다리고 있는데 오비에도를 버스 타고 따라갈까. 너무 솔깃한 얘기라 내일 아침까지 생각해 보기로 했다. 산이 높아서 계속 오르막 길이라는 것보다 중간에 마땅한 숙소가 없어서 또 길에서 자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친다. 순례길에서 경쟁하고 싶지 않지만 숙소경쟁을 은근히 해야하는 게 싫다. 이미 한번 길바닥에서 자보니까 두 번은 피하고 싶고. 왜 힘든 길에는 선택마저 어려운 환경인지 참으로 야속하다. 이미 마음은 버스 안인가 보다. 그래도 부엔 까미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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