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례길 22일 차: 시작이 좋아

프리미티보 길을 걷다

by 탱탱볼에세이

크리스티나와 이타는 산세바스티안으로 돌아갔다. 나는 오비에도를 빠져나와 프리미티보 길을 걸었다. 화살표가 잘 되어있어 한 번도 길을 잃지 않았다. 첫날은 길도 평탄한 편이라 숲길을 즐겼다. 약간의 도로만 조심하면 됐을 뿐. 시작이 좋다!


중간중간 순례자를 몇 명 마주쳤지만 다들 템포가 달라서 인사만 나눴다. 그래도 오늘 처음 사귄 영국인 할아버지 가 교회 가면 도장 찍을 수 있다고 알려주셔서 도장 찍는 재미를 알았다. 대부분 혼자 중얼거리며 영상 찍으면서 걸어와서 심심하진 않았다. 걷는 게 확실히 적응돼서 걸음은 좀 빨라졌다. 이젠 짐이 무거운지 말미에 어깨가 아파온다. 무얼 버려야 할까?


오후 2시에 숙소가 오픈되는데 이미 순례자가 10명 이상 도착해 있더라. 프리미티보 길의 인기를 실감케 했다. 갈증이 나서 숙소의 물을 세 잔이나 벌컥 마셔댔다. 다들 내게 시선이 집중됐다. 순례길 하마 나야 나.


거기다 같이 북쪽길을 걷던 친구들을 4명이나 다시 만나서 반가웠다. 지난 길을 추억하며 땅바닥에서 잤던 일을 공유했다. 오늘은 침대에서 잘 수 있다며 기뻐했다. 비록 2층이지만! 프리미티보 길은 분명 힘들 길이라지만 우린 북쪽길에서 체력이 다져졌으니 조금은 괜찮을 거라며 의지를 불태웠다.


순례자여권 도장칸이 곧 다 채워지더라. 몰랐는데 스페인친구 호세가 여권 하나 더 있냐고 묻는다. 없다고 하니 자기 4개라며 하나 준다. 저번엔 물집 얘기하니 바셀린을 건네주더니 이번엔 여권까지. 나도 고마워서 걷다가 뒷모습 몇 장 찍은 거 보내줬다. 숙소가 여러 번 겹치면 이렇게도 친해진다. 재밌다.


일찍 숙소에 도착하니 샤워도 빠르고 빨래도 다 말랐다. 여긴 탈수기까지 있어서 더 금방 말랐다. 해가 쨍쨍하더니 그새 비가 내린다. 알다가도 모를 날씨에 역시 모든 일은 단정 지을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른다. 스페인 북부는 날씨가 하루에도 수십 번 바뀐다고 했다. 오락가락하는 스페인 날씨는 참 적응이 안 된다.


비가 좀 그쳤길래 틈을 타고 시내에 나갔다. 내일 먹을 빵과 물을 샀다. 산으로 가게 되면 먹을 곳도 없고 물이 모자라기 때문이다. 오늘 한 끼도 안 먹어서 저녁을 먹을 수 있을까 하여 근처 바에 갔다. 역시 저녁은 8시부터니 가능하다고 한다. 비가 와서 어딜 갈 수도 없어서 맥주 한 잔을 주문했다. 땅콩을 한 바가지 가져다준다. 맥주와 땅콩, 졸지에 저녁이 되었다.


와이파이도 바로 연결해서 오늘 찍은 영상을 편집했다. 난 혼자도 참 말이 많다. 생각이 탱탱볼처럼 이리저리 튀어 다닌다. 영상 자막은 음성인식으로 금방 작업이 되지만, 갈무리가 더 오래 걸리는 이유다. 맥주 한 잔을 더 주문하고 편집에 집중했다. 그래도 내 안의 소리를 듣는 일은 즐겁다. 내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구나 돌아볼 수 있다.


비가 잠깐 그쳐서 재빨리 숙소로 돌아왔다. 아홉 시가 다돼 가더라. 열시면 숙소 불이 꺼져서 마지막으로 영상을 구독자의 시선으로 보면서 편집을 마무리했다. 침대에 누우니 비가 쏟아진다. 우르르 쾅쾅 무시무시한 천둥소리도 들린다. 허걱 내일도 비 오려나. 비 오는 순례길은 힘든데. 비에 젖은 가방은 무겁고 그것을 모두 지탱하는 발걸음은 더 무겁다. 최대한 비는 피하고 싶은 마음이다.


프리미티보 길은 북쪽길보다 사람이 많다고 했다. 숙소전쟁이 여기서도 발생할까 조마조마하다. 숙소를 위해서 너무 무리해서 많이 걷진 말아야겠다. 적당히 숙소 오픈 시간이 되면 더 안 가고 멈출 테다. 두 번 땅바닥에서 잠드는 일은 정말 곤란하니 말이다. 시작이 좋은 만큼 내일도 오늘만 같기를. 하고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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