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아이의 엄마로 산다는 것이 이토록 숨 가쁘고 정신 놓는 일이라는 것을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다. 예쁜 색깔의 스카프에도 마음 화사해지고 강렬한 색깔의 구두 하나쯤으로 마음 달래지기도 했던 젊은 날은 아마득한 먼 시대의 이야기처럼 희미해진 지 오래다. 흐트러진 머리와 구깃구깃한 옷차림, 그리고 푸석푸석한 얼굴에도 남 신경 하나 쓰이지 않는 때가 이렇게 올 줄이야. 남 신경도 안쓰면서 나는 왜 나 자신에게 집중하지 못하고 살았던 걸까. 내 정신을 교란시켰던 나의 두 작은 신...
결혼할 때 남편이 물었다. 결혼 선물로 뭐 받고 싶냐고. 이미 예물이며 혼수며 장만할 수 있는 모든 것들과 생략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결정한 후 한 숨 돌리고 있을 때였다. 잠깐 머릿속으로 철없는 욕심도 스쳐갔지만 나는 자신 있게 "책상!"이라고 외쳤다. 결혼을 해도, 아이가 생겨도 나는 나만의 책상이 필요하다고. 잠시 의아해했지만 남편의 표정은 금세 '그 정도야 당근 사주고 말고'로 바뀌었다. 그래서 우리의 신혼살림은 그렇게 나의 책상과 함께 시작되었다.
내 책상. 결혼선물로 남편에게 책상을 받은 것은 정말 신의 한 수였다. 컴퓨터 앞에서 문서를 작성해야 하는 일이 많았던 나, 그런 내가 책상에 앉아 있을 때면 착한 남편은 으레 식사 준비며 집안일을 알아서 하는 게 아닌가. 심지어 냉장고 검사까지 마치고 나면 알아서 마트에 나가 필요한 장을 보고 냉장고를 채워 넣는 그야말로 신기한 마술을 계속 부려대는 것이었다.내가 이를 악용해 본 적은 없지만 내게 이 책상은 그야말로 '매직 테이블'인 셈이었다.
하지만......
그 사이 아이가 생기면서 나의 책상은 갑자기 정체성의 혼란을 겪기 시작했다. 책 대신 기저귀들과 각종 육아물품들- 젖병, 손수건 바구니, 유축기, 물티슈, 치발기 등등-로 채워지기 시작했고 내 눈에 또한 그것은 더 이상 책상으로 보이지 않았다. 아기의 기저귀를 갈 때면 바닥에 눕혀 놓고 가는 대신 책상 위에 작은 요를 접어 깔고 거기에 아기를 눕히니 세상 편한, 서서 가는 '기저귀 테이블'이 된 것이다.
한동안 그렇게 내 눈에서, 내 머릿속에서책상은 '책'과 '상'으로, 또다시 'ㅊ, ㅐ,ㄱ'과 'ㅅ,ㅏ,ㅇ'으로 음운 분열을 수도 없이 일으키며 자기 존재를 부정하고 있었다. 그러다 책상 높이만큼 아이가 자랐을 때, 다시 그것이 '책상'으로 보이기 시작하는 순간이 왔다. 아기 짐이 점점 많아지는 동안 통째로 상자에 담겨 베란다로 나의 책들이 이동하는 대신 알록달록 아기 책들이 책장을 메우고 아이는 그것들을 하나 둘씩 책상으로 들고와 옮기기 시작했다. '기저귀 테이블'이 다시 '책상'이 된 것이다. 아기식탁 의자에 앉은 아이와 나는 책으로 동지가 되었고 나의 첫 아이는 그렇게 '책상'을 '책상'으로 사용할 수 있는 나의 첫 번째 작은 신이 되었다.
내 첫 번째 작은 신과 동지 생활은 오래가지 못했다. 직립보행이라는 인간의 확연한 특징을 선보이며 인간임을 증명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이는 온 세상 것의 창조주가 되고자 했다. 아이 눈에 띄는 모든 물건들은 아이의 손으로 건너가 변형을 거치고 나면 본래의 용도로는 사용불가한 형태가 되어 하나씩 버려지는 일이 늘었다. 한 번은 CD플레이어 뚜껑을 떼고 그 위에 깔때기를 테이프로 덕지덕지 붙이고선 과일 조각들과 과자를 넣고 PLAY버튼을 누르는 게 아닌가! 그 순간 회전 운동이 더해져 약하게 붙여진 테이프는 떨어지고 깔때기는 날아가고 내용물은 그래도 몇 번 돌더니 그대로 원심력을 구현해내었다. 그 물리의 세계를 온몸으로 체험하고 있는 아이의 눈빛은 그 어느 창조주의 것보다 더 빛나고 있었다. "엄마, 내가 믹서기 만들었어요. 우와! 과일에서 음악소리가 나야하는데." 나는 아이의 머릿속이 정말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이제 다음 차례는 믹서기를 CD플레이어로 바꿀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르고 나는 마음이 바빠졌다. 아이 모르게 믹서기를 조심스럽게 아주 깊은 곳에 숨겨두고 한 발 먼저 움직일 줄 아는 엄마란 사실에 스스로를 대견해하면서...... 가끔 생각한다. 내가 숨긴 것은 그 시절, 이 아이의 창조주와도 같은 능력 하나가 아니었을까.
그 뒤로도 나는 이 아이보다 한 발 먼저 앞서 움직이느라 바쁜 하루 가운데 이 아이가 주었던 희한한 즐거움들을 이해하기 위해서 온갖 육아 서적과 심리학 서적을 찾아 밤마다 그 '책상'에서 어떤 깨달음을 얻고자 하였다. 그 때 내가 내린 결론은 아이가 스스로를 신이라 여기고 있음에 틀림없다는 것이었고 신과 인간에 대해 아이에게 가르쳐 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도무지 알 수 없었지만 나는 아이와 함께 그 알 수 없는 세계로 빠져들고 있었음을 인정해야 했다. 그 뒤로 CD플레이어는 우리의 '책상'으로 옮겨져 다양한 발사체로 탈바꿈하는 동안 몇 개의 주방용품들이, 또 몇 개의 가전제품들이 예측 불가능한 형태로 다시 창조되는 일이 반복되었고 그렇게 이 책상은 아이의 멋진 '작업 테이블'이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우리에게 두 번째 작은 신이 강림했다.
오, 신이시여!
내가 둘째를 출산할 때에는 기다리는 모든 것이 제 때에 오는 건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다. 나와 남편과 의사를 지칠 대로 지치게 만든 나의 두 번째 신을 드디어 대면했을 때, 나는 어쩌면 이 아이가 아니라 내가 신인지도 모르겠다고 잠깐 오만한 생각을 해버렸다. 그 오랜 산고와 기다림이 어찌 인간의 것일 수 있단 말인가.
둘째 아이는 자라면서 아이가 보여줄 수 있는 온화함이란 온화함은 모두 보여주었다. 행동반경은 첫째 아이의 10분의 1도 되지 않았지만 언제나 첫째 아이가 누비고 지나간 자리 어느 한 켠에서 늘 조용히 자신만의 세계를 넓혀나가고 있었다. 어느 날, 둘째 아이가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아이의 그림 속에는 언제나 자신이 등장했다. 첫째 아이의 그림은 언제나 외부 세계에 대한 관심으로 온갖 물건과 보이는 세상의 다른 쪽, 그것들이 빚어내는 온갖 현상들을 희한하게 담아내고 있었고 자기 자신은 그림 속에 없었다. 한번은 이 그림에서 너는 어디 있냐고 첫째 아이에게 물었는데...... "엄마, 나는 이 그림 밖에 있지. 내가 보고 있는건데 어떻게 그림 속에 들어가요?" 역시 이 아이의 창조주 포지션은 아직 바뀌지 않았구나. 반면, 둘째 아이는 늘 자기 자신의 모습에 대한 상상과 그에 따라 달라지는 주변 사람들, 그리고 그 관계에 관심이 많았다. 그림 속의 아이는 늘 공주 드레스에 알록달록 머리 장식을 하고 따뜻한 표정을 짓고 있었는데 이름을 '작손이'라고 지어주었다. 다른 또래 친구들보다 손이 작아서 '작손이'란다. 그런데 그림 속에는 이야기가 담겨 '작손이'가 '큰손이' 친구들에게 이렇게 대사를 한다. "나는 작손이야, 하지만 나는 큰손이가 되고 싶지 않아. 왜냐하면 엄마아빠가 나를 작손이로 낳아주셨는데 큰손이가 되면 나를 못찾으실거야."
나는 아이의 그림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있는 시간이 정말 행복했다. 그리고 내가 이 아이에게서 무언가를 배우고 있단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 정말 자기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은 자신이 대단한 무언가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과 중요한 관계의 사람들 속에서 스스로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는 일이란 것을 이 아이의 이야기 속에서 배웠다. 이렇게 나의 두 번째 작은 신은 천 번, 만 번 새롭게 태어나고 성장하는 자신의 캐릭터를 그리면서, 멋진 대사를 만들어내고 우리에게 따뜻한 즐거움을 만들어내느라 바빴고 이 아이에게 책상은 온갖 미술도구로 가득한 '창작 테이블'이 되었다.
지금 우리 집에는 테이블만 아홉 개가 있다. 두 아이 모두 각자의 책상이 있지만 우리는 어떤 테이블에서든 무언가를 함께 만들고 그리고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한다. 그 중에 나는 '나만의 테이블'을 지금껏 고수하고 있음을 밝혀본다. 나의 두 작은 신들이 차례로 거쳐가는 동안 두 신들의 세계를 보여주고 결국은 다시 나의 세계를 찾게 해 준 테이블이다. 신이란 인간을 일단은 겸손하게 만드는 존재라고 한다면, 나의 두 아이는 나에게 틀림없는 신이다. 그들의 세계를 기꺼이 구경시켜주고 출입시켜 준 두 신에게서 결국 나는 선택받은 인간이라 해야겠지. 오늘도 나는 '나만의 테이블'에서 올곧이 자신에게 충만한 시간을 뿜어내며 두 신을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