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기전 이렇게 뜸들인 책이 있었던가
읽으면서도 이렇게 뜸들인 책이 있었던가
예전 <소년이 온다>를 읽으며 길게, 많이 아파했고
'인간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왜 인간인가' 라는 질문을 오래 끌고 다녔던 기억.
이번에도 이 책이 나를 괴롭힐 것을 알기에
책을 받아들고 며칠 묵혀두었다.
맘먹고 읽기 시작했지만
처음부터 한강이 마련해놓은 이미지들에
나는 푹 빠져들었다.
ㅡ 성근 눈이 내리고 있었다
죽음이나 무덤, 폭력, 학살같은 아비규환의 이미지가 아니라 한없이 조용하고 깨끗한 눈의 이미지,
그리고 자유롭고 가볍고 연약한 새의 이미지로
실을 뽑아 짜내듯 이야기를 엮어나가는데...
눈의 생성과정에서 소멸까지
과학적 근거가 바탕이 된 인간과 세상에 대한 의미부여, 그리고 통찰이 참으로 감동적이었다.
눈의 결정을 이루는 물분자뿐만 아니라 먼지나 재의 입자까지 결속하고 그 결속의 경계, 그 어디 사이의 텅빈 공간들이 외부의 소리를 빨아들여 실제로 눈덮힌 날, 그리 고요한 것이라는데...
눈의 복합적인 이미지들이 한동한 내 머릿속을 꽉 채웠고
흰 빛깔과 고요함 속에서 소금가루 밟는 소리의 이미지로 전환되면서 나는 내내 그 '결속'이라는 눈 결정의 본질적 존재방식에 깊히 골똘하였다.
침착성.
침통한 침착성.
아, 역사적 트라우마를 겪은 이들의 고통을 견디는 방식이 바로 이것이었구나.
저 차갑고 희고 고요한 눈과도 같이 자신들이 겪은 고통을 모두 음소거하듯 침착하게 살 수밖에 없었던 이유. 눈이 내릴때마다 먼지와 재를 계속 결속하면서 낙하하다가 땅에 닿으면 녹아버려 흔적없이 사라지는 눈.
그것을 얼마나 반복해왔던 것이냐.
눈송이의 가벼움과
하늘을 맘껏 나는 새의 가벼움을
한강은 다르게 인식한다.
결코 가벼운게 아니라는.
속눈썹 위에 내려앉은 눈의 무게감을 느껴보신 분들은 아시리라.
눈도, 새도
공중에서 흩날리거나 날기 위해선 모두
빈공간 ㅡ 새의 폐와 뼈에는 몸을 가볍게 하기 위한 '기낭'이라는 구멍들이 존재한다고 한다. 통뼈가 아니었다. ㅡ 을 품어야하고 그렇게 날 수 있다고 해서 그것이 이들의 전형적인 존재방식도 아니다.
이렇게,
나에겐 눈의 이미지로 각인된 이 작품은
군데군데 주인공 친구의 이야기와 그 친구 어머니의 이야기들이 마치 꿈을 꾸다 깨고, 또 잠들어 꿈을 꾸다 또 깨고... 비몽사몽의 느낌으로나마 떨칠 수 없는 고통을 감각하게 만들어 주었다.
작품의 이야기 전개에서도 제대로 뜸을 들여준 한강작가의 심정이 전달되면서 그것이 나같은 독자를 배려한 것이라고 믿는다.
이미 읽으신 분들,
지금 읽고 계신 분들,
앞으로 읽으실 분들,
혹은 읽지 아니하실 분들까지도
이 겨울 맞이하게 될 눈은
새롭게 인식하여보시길 희망해본다.
벌써 내마음 속엔 눈이 한가득 쌓인 기분이다.
고요한 모든 것은 사연이 있다.
실컷 울어봅니다.
#노벨문학상
#작별하지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