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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툰자 Apr 27. 2022

대체 불가능한 장소 (NFP)

우울하거나 기운이  없을 때

군산이라는 소도시엔  아직  5일장이 선다. 다 사라지고  하나 남은 5일장이다. 18세기 중엽에는 전국에 시장이 천여 곳이나  열렸다고 한다. 당시 장터는 물건을 사고파는 역할뿐만 아니라  다른 마을에 사는 친척이나 친구를 만나는 곳, 판소리나 탈춤 공연을 즐길 수 있는 문화의 장이며 나라 돌아가는 정보를 소통하는 곳이었다. 조선 후기에  일어난  농민  봉기와 일제  강점기 만세 운동도 주로 장터에서 시작되었다. 요즘 말로 하자면  핫 플레이스, 인정과 열정, 꿈넘치는 뜨거운  장소다.


군산 시내에서 좀 떨어진  대야면에는  날짜에 1과  6이  들어가는 날마다 장이 열린다. (31일은 쉰다)  몇 년 전  대야 초등학교에  일하러 다닐 때는 장날마다 투덜거렸다. 장날만 차가 막히다 보니  미처 생각하지 못하고 평소대로 시간을  맞춰간  날에는  신호등 앞에서  빨간불로 바뀔  때마다  애가 탔다.


대야장을 수없이 지나쳤지만 한 번도 구경할 생각을 안 했는데  올해 1월 설을  앞두고  문득  어린 시절  5일장이 떠올랐다. 명절을 앞둔 5일장은 어떤 시장보다도 풍성하고 활기찬 장소였다.




삼십대 우리 할머니는 한복이나 옷감을 파는 포목점을 열었다. 할머니는 가르마를 곱게 가르고 비녀를 꽂은 머리에  항상 한복을 차려입었다. 추운 겨울에도  한복 위에  엄마가 떠 준 스웨터와 목도리만 두르고 다녔다. 할머니 가게에 심부름을 가면  자투리 옷감을 가지고  소꿉놀이를 하고 금박 무늬가 화려한 한복을 몸에 대보며 공주나 왕비되었. 그 시절에는 새해에 한복을 새로 맞춰  입는 어른들도, 색동이 들어간 한복을 사는 아이들도 꽤 있었다. 할머니는 손님  맞느라 바쁘고 나 혼자  심심해지면 시장을 한 바퀴 돌았다. 과일, 채소, 생선  모든 게 풍성한 시장. 특히 을 앞둔  대목장은  인산인해였고 평소보다 좋은 물건들이  넘쳤다.


뻥이요!   

뻥튀기  아저씨의 우렁찬 외침이 들리면 재빨리 귀를 막아야 했다. 지진이 난 듯 땅이 한 번 흔들리고 나면 구수한 냄새가  하얗게  쏟아졌다. 과일전에는 붉은 단내가,  생선전에는  푸른 비린내가 진동했다. 살아 있는 느낌. 뭘 사거나 팔지 않아도 팔과 다리가 팔팔하게 움직이고 오감이 생생하게 살아나는  공간이었다.


찐빵집 앞에서는 커다란 솥뚜껑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내 몸통보다 큰  뚜껑이 열리고  뿌연 김이  안개처럼  사라지면  하얀 구름빵이 접시 위에 내려앉았고 아주머니는 구름 위에 반짝이는 가루를  뿌렸다. 침을 삼키며  할머니에게 조를 요량으로 잽싸게 가게로 돌아오곤 했는데...




정말 오랜만에 찾은 5일장은 예전과  다르지 않았다. 설을 앞둔 5일장이라 그런지 사람들도 꽤 많았다.  슈퍼마켓도  대형 마트도 있고, 상설 전통 시장도  있지만 강한 생명력이 느껴지는 건 5일장이다. 고단한 얼굴에 투박한 손으로 물건을  정리하는 상인들이  건강해 보인다. 칼바람  부는 난전에서  새벽부터  자리 잡고 물건을 펴느라  떨었을 그들이지만  손님들 앞에서는 세상에서 제일 좋은 물건을 내놓은 듯  당당하다.


시장에 갈 때는 시장기가 좀 있을 때 가자. 한 바퀴 휘휘 둘러보며 살 것은 점찍어 두고 요기부터 하자. 배고프면  대충 고르거나  살 물건을 빠뜨릴 수 있다.  또  바리바리 양손에 물건을 들고는 먹을 엄두를  못낸다. 빈대떡은 한 장만 먹자. 더 욕심내면 느끼하고  배부르면 개운한 장터국수를 먹지 못한다.



장터국수까지 먹고  찜한 물건들을 장바구니에 담기 시작했다. 온라인 장바구니에 담는 건 가볍고 심심한 일이지만  진짜 장바구니는 무거워지는 만큼 행복해진다. 콩나물 한 통, 버섯 두 소쿠리, 싱싱 섭과 굴, 사과, 시금치, 바로 구운 김.  금세 대형 장바구니 두 개가  꽉 찼다.  팔, 다리가 바쁘고  눈과 귀, 코가 활짝  열리는  이 공간에서는 우울할 새가 없다.  바다에서, 들에서  올라온 싱싱한 것들을 보면 기운이 없던  나도  싱싱해진다. 거기에 생생하게 떠오르는  행복한 추억은 덤.  



5일장의  매력을  듬뿍 느끼고 돌아온 후 주말과 겹치는 대야면 5일장을 달력에 체크해 두었다. 다른 일정들이 생겨 찾지 못하다 3월 초갔더니 온 시장이 꽃 세상이다. 산과 들보다 시장에 봄이 먼저 온다는 걸 알았다.  


동네마트 대형할인점에서는 원 플러스 원이나 할인 상품을  찾으며 쩨쩨하게 구는데 시장만 오면 플렉스 하게 된다. 조기도 박대도 덥석덥석  담고 포장된 채소나 과일이 아니라 세 식구가 먹기엔  많은데도 '소쿠리에  있는 거  다 주세요' 하게 된다.



4월 초에는  삼례읍 5일장에  다녀왔다. 3과 8이 들어가는 날짜에 장이  열리는데 삼례장은 대야장보다 더 컸다. 식목일을 앞두고 있어서 나무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절기의 변화에 따라 달라지는 시장 풍경도  신선하다. 5월에는 어느 지역의  5일장을 가볼까  궁리 중이다. 전국에 여전히  많은 장이 선다. 대형  할인점이 슈퍼마켓, 온라인 시장으로  대체할 수 없는 5일장이 오래오래 사라지지  않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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