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국이 다시 시끄럽다. 올들어 반정부 시위가 계속되고 오랜 세월 금기시돼온 왕정을 겨냥하는 상황으로 이어지자 군사정권은 비상조치를 내려 사실상 모든 집회를 금지시켰다. 하지만 탁신 친나왓 전 총리가 왕실과 군부를 비롯한 기득권층에 의해 쫓겨난 뒤 거듭 반복돼온 시민들의 반발을 군부가 이번에도 찍어누를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다.
방콕포스트 등 현지 언론들은 15일 정부가 5인 이상 모이는 것을 금지하고 ‘국가안보를 해칠 수 있는’ 뉴스나 온라인 메시지 전달도 모두 금지하는 긴급포고령을 내렸다고 보도했다. 방콕에서는 몇 달 째 쿠데타로 집권한 쁘라윳 짠오차 총리의 퇴진과 왕실 권력 축소를 요구하는 시위가 이어지고 있다. 정부는 국영TV를 통해 방송된 대국민 성명에서 “이 상황을 효과적으로 끝내고 평화와 질서를 즉시 복원하기 위해서는 비상조치가 필요했다”고 설명했다.
전날 와치랄롱꼰 국왕은 왕비와 함께 불교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차를 타고 궁을 나와 랏차담넌 거리로 이동했다. 시위대는 국왕 행렬이 지나가는 동안 불복종의 표시로 세 손가락을 치켜세우며 왕권 제한과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구호를 외쳤다. 2만명에 이르는 시위대는 경찰 바리케이드를 뚫고 정부 청사로 행진했다. 이 날은 1973년 군사정권에 맞선 ‘10·14 봉기’가 일어난 지 47년 되는 날이었다. 태국에서는 이 날을 ‘완 마하 위빠욕(큰 슬픔의 날)’이라 부른다.
민주화 시위대가 행진을 하는 동안 또 다른 쪽에는 친정부 시위대가 왕실에 대한 지지를 상징하는 노란 셔츠를 입고 집회를 했다. 일부 경찰들이 민간인 복장으로 왕실 지지 집회에 가담했다는 보도도 있었다.
긴급포고령이 발표된 뒤 폭동진압 경찰이 집회를 해산했으나 시위대는 정부 청사 부근에 텐트를 치고 농성을 계속하고 있다. 태국인권변호사회는 경찰이 시위 지도자 최소 3명을 체포했다고 밝혔다. 국제인권단체 휴먼라이츠워치는 8월 이후 자뚜팟 분빠타라락사 등 민주화 운동가 20명 이상을 체포했으며 구금된 사람들 중 몇몇은 방콕 북부 경찰 구금시설에 갇혀 불법 심문을 받고 있다고 비난했다.
합법적인 선거로 선출된 탁신 정권이 2006년 축출된 이래로 태국에서는 정정 불안이 가시지 않고 있다. 군부는 탁신 당시 총리가 유엔 총회 참석하고 있는 동안 무혈 쿠데타로 몰아내고 퇴역장군이 이끄는 정부를 출범시켰다. 이듬해 군부가 주도한 개헌안이 통과됐으나 2008년 새 헌법에 따라 치러진 선거에서 탁신계가 다시 승리를 거뒀다. 군부와 반탁신계는 탁신을 부패죄로 기소했고, 탁신은 영국으로 망명했다. 2010년 탁신을 지지하는 ‘붉은 셔츠’ 시위로 방콕이 마비되자 군부가 무력 진압에 나서 90여명이 목숨을 잃었다.
하지만 2011년 다시 치러진 선거에서 또 탁신계가 승리, 탁신의 여동생 잉럭이 총리가 됐다. 그러나 2014년 헌법재판소는 잉럭 총리가 직권을 남용했다며 권한을 중지시켰고 그 틈을 타 쁘라윳 장군이 이끄는 군부가 쿠데타로 집권했다. 탁신계를 몰아내고, 선거를 하면 국민들은 다시 탁신계를 지지하고, 군부가 다시 탁신계를 몰아내는 일이 되풀이된 것이다. 그러는 동안 탁신계를 막는 데에 급급한 군부와 기업계가 태국어를 잘 못하는 유학파를 총리후보로 내세우는 코미디 같은 일도 일어났다. 잉럭을 쫓아낼 때에는 향후 정치활동을 아예 막기 위해 이미 총리직에서 사퇴했는데도 탄핵안을 통과시켰다.
이 과정에서 두드러졌던 것이 왕실과 군부의 결탁이었다. 탁신에 반대하는 노란 셔츠 시위가 일어나면 군부와 왕실은 ‘중립을 지킨다’며 방조했고, 친탁신 붉은 셔츠 시위는 유혈진압하는 식이었다. 특히 대내외적으로 ‘백성의 사랑을 받는 군주’로 알려졌던 푸미폰 아둔야뎃 국왕 시절 왕실의 교묘한 정치 개입은 극에 달했다. ‘정치 위에’ 있는 국왕인 것처럼 행동했지만 왕실모독죄를 명분 삼아 여론을 통제하고 언론을 탄압하는 것으로 악명 높았다.
쁘라윳 정권은 쿠데타 뒤 국왕 승인을 받은 과도헌법을 만들었다. 이 법에 따라 1년 이내에 민간 정부에 권력을 이양하고 새 헌법을 만들기로 했으나 육·해·공군 장성들이 전면에 포진한 군부 정권은 권력을 내놓지 않았다. 정권의 정통성을 떠받쳐주는 것은 강압적 통제와 왕실의 지지뿐이었다. 쁘라윳 집권 뒤 지난해까지 5년간 계엄통치를 하면서 ‘코소초(평화질서위원회)’라 불리는 군부 기구가 경제까지 쥐락펴락했다. 정부가 2016년 태국을 고소득국가로 이동시킨다는 ‘타일랜드 4.0’ 계획을 내놨지만 이렇다할 성과는 없었다.
특히 올들어서는 국내총생산(GDP)의 10~20%를 차지하는 관광산업이 코로나19로 엄청난 타격을 입었다. 실업률이 1%대로 낮은 것이 태국 경제의 자랑거리였는데, 국가경제사회개발위원회 발표에 따르면 올 4월까지 400만명이 일자리를 잃었다. 이 수치는 연말이면 1400만명으로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쁘라윳 정권에 2016년 푸미폰 국왕의 타계는 결정적이었다. 와찌랄롱콘 국왕은 오래전부터 구설이 잦고 국민들의 신망을 얻지 못했으며, 즉위 이듬해에 군부가 만든 헌법을 승인해 꼭두각시임을 보여줬다. 즉위 이래 대부분의 시간을 외국에서 보낸 국왕은 최근 독일에서 돌아왔다.
쁘라윳 총리는 민간 정부 이양이라는 약속을 뒤집고 지난해 3월 고강도 통제 하에서 치러진 총선으로 재집권했다. 군부 독재에 대한 반발은 점점 커지고 있고, 올들어서는 시민들의 반발이 군부 뒤의 왕실로도 향하고 있다. 특히 푸미폰 전 국왕에 충성심을 보여온 중장년층과 달리 젊은 세대들은 왕실 유지 비용에도 반발심을 갖고 있다고 BBC 등은 전했다.
‘탁신과의 싸움’에 나라를 혼란으로 몰아넣은 기성 정치권에 반대하는 젊은 층 사이에서는 지난해 총선에서 3당으로 부상한 팟아나콘마이(퓨처포워드)당 지지율이 높았다. 기업가 출신 타나톤 중룽르앙낏 대표가 이끌던 이 당은 군부의 정치 개입에 반대하고 관료의 중립화와 사회·경제적 평등을 내세워 인기를 끌었으나 지난 2월 헌법재판소의 명령으로 해산됐다. 거기에 더해 6월에는 유명한 인권운동가로 2014년 쿠데타 뒤 망명 중이던 완찰레암 삿삭싯이 캄보디아에서 실종되는 사건이 일어나 시민들의 분노에 기름을 부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왕정을 옹호하는 여론이 적지 않고, 민심은 둘로 갈려 있다. 당국은 유혈진압을 불사하겠다는 태도를 보이고 있으나 이것이 더 큰 반발을 부를지 혹은 이번에도 찍어누르기에 성공할 지는 미지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