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길고 다양한 덕질의 역사. 그 안에서 찾은 덕질의 의미
내가 덕질에 처음 눈을 뜬 건 초등학생 때였다. 그 전까지(라고 해봤자 몇살 안되지만)만 해도 빅뱅이다, 동방신기다, 하는 아이들 사이 속에서 나는 아무도 좋아하지 않는, 요즘 말로 하자면 '머글' 중의 '머글'이었다. 이런 나를 바꿔 놓은 건 초등학교 6학년 때 저 멀리 다른 지역에서 온 전학생이었다. 전학생은 나에게 그 당시 유행하는 만화를 알려주었고 신세계를 알게 된 나는 그 만화에 홀딱 빠지게 되었다. 그때를 시작으로 하루도 빠짐없이 덕질을 하는 덕후의 인생을 살게 되었다.
그 어릴 적 읽던 만화부터 시작해 중학생 시절 좋아하게 된 아이돌, 밴드를 거쳐 고등학교 시절 좋아했던 축구 선수, 배우, 영화까지. 내 인생은 다양한 덕질과 함께 흘러갔다. 고로 나는 항상 누군가 혹은 무엇인가를 '사랑'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덕질은 나에게 현실 도피처이자 이상적인 안식처였다. 현재 내게 처해진 상황과는 다르게 반짝반짝 빛나는 저 너머 세상. 내 눈 앞에 놓인 현실을 바꾸려면 많은 노력과 시간이 필요했지만, 모니터 혹은 액정 속 세상은 버튼 하나만 누르면 언제나 빛나고 행복했다. 이 세상은 내가 메우지 못하는 것들을 채워줬다. 이게 나를 중독시켰다. 항상 아드레날린이 폭발하는 이 곳이.
아주 가끔, 덕질을 안 하던 시기도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덕질은 하고 싶었으나 좋아하고자 하는 대상이 없었다. 그럴 때면 항상 마음 한 구석이 허했고 하루하루가 느리게 흘러가 사는 게 지루했다. 억지로 덕질 상대를 찾아다니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면 이게 얼마나 미련한 짓이었는지. 나는 항상 나 자신을 위해 덕질 한다고 생각했다. 이 지루한 세상을 즐겁게 살아가기 위해 어쩔 수 없는 필수적인 것이라고.
덕질은 시간과 돈을 투자해 키우는 마음이었다. 때문에 내 소비 순위의 1위는 언제나 덕질이 자리 잡고 있었다. 덜 먹고 덜 입어도 덕질에 쓰는 돈만큼은 아끼지 않았다. 시간 또한 그랬다. 다른 것 할 시간에 덕질 하나라도 더 했다. 그럴수록 나는 덕질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자꾸만 집착하게 되었다. 내가 모르는 새로운 정보가 하나라도 있으면 자존심이 상했고, 그렇기에 항상 덕질 커뮤니티에 상주해 있었다. 이런 과정을 통해 덕질이 내 인생의 주도권을 잡게 되었다. 내가 감정이입으로 대리 행복감을 느낄 동안 덕질이 내 인생에서 나 자신을 밀어내고 있었다. 내 인생인데 내가 설 자리가 없었다. 덕질은 더 이상 원동력이 아니었다. 점차 나 자신이 흐릿해져 가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남의 인생을 대신 살아주고 있던 것이다.
덕질 대상은 나 없이도 잘 살지만 나는 나 없이 살 수 없다. 시간과 돈을 투자해 키워야 할 것은 나였던 것이다. 이 모든 걸 깨달은 새벽. 침대에 누워있던 깜깜한 내 방 크기보다 더, 내가 그동안 살아온 시간의 크기만큼 허무함을 느꼈다. 동시에 그동안 무심했던 나 자신에게 미안함을 느꼈다. 몇십 년 동안 나를 너무 외면하고 살았구나. 내가 이렇게 나 자신을 안 챙기는데 지루하고 안 한심한(나는 항상 한심한 인생을 살고 있다고 생각했다.) 삶을 살지 않는 게 이상하지. 나는 남 행복을 응원하는 대신 나 자신을 돌봐주고 내 행복을 응원하기로 했다.
나 자신에게 집중하고 주도적인 인생을 살기로 한 후, 현재인 지금은 덕질을 안 하고 있느냐. 그건 또 아니다. 난 아직도 덕질을 하고 있다. 어찌됐든 덕질은 내 인생의 반 이상을 함께 했기에 내 몸 안에 녹아든 덕질 DNA는 뗄래야 뗄 수 없었다. 단지 덕질과 인생의 균형을 맞출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현재 나에게 덕질이란 무엇일까. 균형을 맞춰 제 기능을 하게 된 덕질은 원래 기능을 되찾아 진정한 원동력이 되었다. 등 뒤로 단단히 맨 로켓 같은 거. 도를 넘지 않은다면 덕질은 가끔 다양한 길을 제시해주곤 한다. 덕업일치 같은 목표처럼 말이다.
나 스스로 내 인생을 꾸려가기엔 아직 위태로운 삶이라 언젠가 다시 인생을 덕질에 몰아넣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건 그만큼 내 인생을 포기하고 싶고 외면하고 싶다는 신호일 것이고 이제 나는 그걸 알고 있다. 나는 그대로 현실 도피처에서 허우적 대지 않을 것이다. 빠져나오기 위해 최대한 노력할 것이다. 그것만으로 나는 전과 다른 덕질 라이프를 보내고 있다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