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탱탱볼에세이 Jun 20. 2023

뚤루즈 5일 차: 너는 다 계획이 있구나

친구의 계획을 따라

친구가 뚤루즈에 살아서 5일 동안 친구네에서 편하게 지냈다. 빨간 지붕과 벽돌로 통일감 있게 꾸며진 동네에 골목골목이 참 아기자기해서 보물찾기 하는 맛이 있더라. 친구 끌로에는 일 시작하자마자 자기 집을 샀다.


보통 프랑스에서는 월세 내는 게 아깝다고 생각한단다. 은행에서 대출받아 본인의 집을 구매하는 게 일반적이라고. 그래서 25년 동안 월마다 이자를 내야 한다고 말했다.


친구 남자친구도 같은 상황이라고 했다. 내년에 이제 동거를 시작할 계획인데 그러면 집이 두 채라 친구집은 에어비앤비를 할 생각이란다. 실제로 친구는 감각이 좋아서 리모델링을 하고 이케아와 빈티지 가구를 잘 골라 예쁘게 집을 꾸몄더라.


가구와 소품 하나하나에 친구 손이 안 닿은 것이 없었다. 예를 들면 액자 모양 전신거울은 중고로 구매해서 집에 직접 가져와야 했는데 자가용에 실으려고 하니 차가 상대적으로 작아서 운전석에 거의 닿을 정도로 힘겹게 옮겼다고. 그런 친구의 이야기가 궁금해서 별도로 인스타그램 계정을 파서 공유해 보는 게 어떻겠냐고 했는데 프랑스인들은 이런 인테리어와 소품에 크게 관심이 없단다.

*액자가 여러개가 벽에 걸려져 있었는데 빈 자리가 많더라. 왜 비어있는 곳이 있냐고 물었더니 정말 좋은 사진들로만 채우고 싶었다고. 앞으로 채워갈 행복이 많아서 오히려 좋아보였다.


보통 인플루언서는 뷰티나 패션 쪽에 치중되어 있다고. 그럼 아직 인테리어 쪽으로는 유명한 인플루언서가 없으니 기회가 아니냐며 블루오션일 때 해보는 게 어떠냐 했는데 친구는 일하는 걸로도 바빠서 여유가 없다고 했다.


근데 친구가 집 구경은 꼼꼼하게 시켜줬는 지 모를 일이다. 덕분에 친구집, 친구네 부모님 댁, 친구 남자친구집구석구석 모든 공간을 구경했다. 한국의 오늘의 집 서비스엔 서로 자기 집 어떻게 꾸몄는지 공유하고 싶어서, 남의 집 인테리어가 궁금해서 난리인데 신기했다.


참고로 프랑스는 결혼을 쉽게 안 하고 동거만 하는 추세라고 한다. 세금을 절약하기 위해서 동거하게 되면 팍스(PACs)는 꼭 한다고. 결혼보다 느슨한 가족 결합 제도인데, 동거를 해도 법적으로 보호받을 수 있다. 이혼보다 절차도 간단해서 출산율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주었다고 하는데, 우리나라엔 그런 게 없어서 대단히 새로웠다.


친구는 엄청난 계획형 인간이었다. 내가 여행 와서 심심하지 않도록 모든 일정을 다 계획해 주었고 난 친구가 고른 코스대로 따랐다. 정말 고심 끝에 고른 곳들이라 난 즐기기만 하면 되었다. 장기여행 막바지에 다다른 사실 나는 큰 여행에 대한 욕심은 이제 없었다. 그저 오랜만에 친구를 만나고 싶었던 것일 뿐.


하지만 다 계획이 있는 친구 덕분에 뚤루즈 구경도 제대로 하고 완벽한 하루하루를 보냈다. 거기다 친구는 자가용도 있고 자가도 있고 심지어는 자기 교통카드도 내어주고 갈 곳도 추천해 주며 내가 즐겁게 여행하도록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었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토요일 저녁엔 프랑스 럭비 결승전이 있었다. 프랑스 사람들은 럭비를 좋아한단다. 심지어 뚤루즈 팀은 전국에서 가장 럭비를 잘하는 팀 중에 하나란다. 결승전에 뚤루즈와 라로쉘이 맞붙었다. 서로 비등비등하다가 후반전에 라로쉘이 4점 앞섰다.


럭비는 전반 40분, 후반 40분으로 이루어진다. 후반전 5분밖에 남지 않자, 친구는 아쉽지만 기회가 없다고 이번엔 졌다고 아쉬워했다. 난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라며 중요한 건 꺾이지 않는 마음이라고 기다려보라고 했다.


아니나 다를까 큰 실수를 저질렀던 뚤루즈 10번 선수가 고군분투해서 5점을 만들어냈다. 보너스 점수까지 2점 더 획득하고 결국 뚤루즈가 3점이나 앞서서 아름다운 승리를 거뒀다.


난생처음 보는 럭비 경기는 사실 살벌했다. 공을 향해 서로 격렬하게 몸을 부딪혔다. 가끔은 선수들 얼굴에 피가 흐르기도 했다. 그럼에도 경기는 별 탈없이 계속되었고 손에 땀을 쥐게 하는 긴장감으로 내가 뛰는 느낌마저 들었다. 마지막까지 힘들게 집중해서 경기에 이겼을 때 더욱 짜릿했다. 역시 이 맛에 스포츠를 하나 보다. 멋진 경기 덕분에 나도 뭔가 해내고 싶다는 기분이 들게 했다.


일요일엔 프랑스 어버이날이라서 친구네 부모님 댁도 놀러 갔는데 정말 따뜻하고 다정한 분들이셨다. 친구네 엄마는 내가 친구를 한국에 처음 왔을 때 챙겨줘서 고맙다고 하셨다. 그저 나는 친구가 기숙사 들어가기 전 며칠 재워준 것뿐인데. 과거의 조그만 베풂을 크게 돌려받았다.


친구가 계획형 인간으로 자란 것도 역시나 부모님의 영향이었다. 항상 어렸을 때부터 부모님이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물었다고 한다. 지금도 그렇다고. 그래서 친구는 계획이 없으면 불안함을 느낀다고 한다.


친구네 가족도 계획이 있었다. 2주 뒤에 친구네 아버지 땅에 3일간 음악축제를 연다고 한다. 여러 밴드들을 섭외해서 공연은 어디서 하고 음식은 어디서 나눠주며 샤워는 어떻게 할지 가족회의를 했다. 나는 프랑스어를 기본회화수업밖에 안 들어서 소귀에 경 읽기 수준으로 참관했다. 중간에 깜빡 졸아버렸고 바로 검거되었다. 내게 프랑스어는 차마 풀지 못한 수능 수학문제처럼 여전히 어렵다.


독일에서 대학 다니려고 교환학생 갔다가 1년 만에 적성에 맞지 않음을 느끼고 돌아온 나로서는 혼자서 한국에서 4년 동안 공부한 친구가 대단했다. 남의 나라 언어 입에 맞지 않는 음식 다른 문화적 배경 모든 것이 낯설고 외롭고 불편한 환경인데 그것을 견뎌냈으니 말이다. 사실 여행하는 것도 오랜 기간 하면 이렇게 지치는데 공부를 하는 건 얼마나 더 에너지가 필요한 일인지.


친구는 생각보다 본인의 능력을 인정하지 못하고 겸손했다. 나는 친구한테 네가 얼마나 스스로 멋진지 인정해 주라고 했다. 내가 나를 인정해야 다른 사람도 나를 빛나게 본다고 말이다. 난 50을 가지고 있어도 150을 가진 것처럼 행동한다고 넌 100을 가지고 있으니 나 같은 애들을 생각하며 100을 충분히 인정해 주라고 격려했다. 그녀의 계획과 도전이 부디 100의 힘을 발휘하길 바랄 뿐이다.


한국말 잘하는 다 계획이 있는 친구 덕분에 말이 안 통하는 낯선 곳에서 따뜻한 정을 느꼈던 5일이었다. 결과적으로 뚤루즈는 프랑스에서 가장 좋아하는 도시가 되었다. 친구에게 또 한국에 놀러 오라고 당부했다. 언젠가 또 내가 받은 베풂을 돌려주는 날이 있겠지?


낯선 환경에서도 편안함을 느낄 수 있게 하는 배려에 대해 배운 시간이었다. 이 기분과 방법을 잘 기억했다가 나도 또 다른 이에게 베풀어야지. 친구 덕분에 느슨한 나에게도 계획을 더 촘촘히 해야겠다는 의지가 생겼다. 친구에게 여러모로 배우는 게 많은 여행이다. 곁에 친구가 있어서 얼마나 좋은가!

매거진의 이전글 뚤루즈 1일 차: 하루에 국경 두 번 넘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