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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탱탱볼에세이 Oct 10. 2023

삼대가 덕을 쌓아야 볼 수 있다는 이것

과연 볼 수 있을 것인가

 새벽 4시 알람이 울리지도 않았는데 다들 약속이라도 한 듯이 일어난다. 그렇다, 여기는 지리산 장터목 대피소다. 아침 6시 반 천왕봉 일출을 보기 위한 대작전이 시작된다. 한 시간에서 한 시간 반이면 정상에 올라갈 수 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우린 4시 반부터 산을 올랐다.


 깜깜한 어둠 속에서 랜턴 불빛 하나에 의지해서 오르고 또 오른다. 눈앞에 펼쳐진 것이 어떤 모습인지 전혀 모르기 때문에 그저 직진할 뿐이다. 중간에 배가 고파서 에너지바 하나를 까먹었다. 편의점에서 원플러스 원하는 걸로 듬뿍 사 오길 잘했다. 에너지바를 먹으면 이름값대로 에너지가 급속충전된 기분이 든다.


 에너지바의 힘이 통했을까. 가뿐하게 통천문에 도착했다. 천왕봉을 오르는 관문이다. 나는 왠지 통닭천사의 문이란 생각이 들었다. 아마도 통닭이 먹고 싶었나 보다. 일찍 서두른 탓에 통천문에 5시 20분쯤 도달했더라. 통천문을 지나면 확 추워진다고 해서 통천문을 통과하는 구석에서 잠시 대기했다.


 새벽 6시 통천문을 통과하니 거센 바람이 들었다. 씌익씌익. 마치 잘 안 나는 단소를 있는 힘껏 불었을 때 나는 소리가 들렸다. 추위에 된통 겁먹어서 꽁꽁 동여 멘 덕분에 땀이 났다. 땀이 나니 또 더워졌다. 추울 땐 따뜻한 걸 찾다가도 더우면 또 시원한 걸 찾는 변덕스러운 나를 본다.


 통천문에선 20분~30분이면 천왕봉에 도착한다. 눈 깜짝할 새에 정상이더라. 옛날에 아빠, 엄마, 오빠의 인증샷으로만 보던 천왕봉 표지석을 보니 반가웠다. 안개가 자욱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으나 표지석 앞엔 사람들로 붐볐다. 6시 30분인데도 해가 떠오를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천왕봉 일출은 깔끔히 포기하고 열심히 천왕봉 표지석에서 인증사진을 남기고 하산하였다. 지리산도 무심하시지 하산하고 30분 정도 지나니 안개와 구름이 깔끔하게 걷히더라. 천왕봉 일출은 삼대가 덕을 쌓아야 볼 수 있다던데. 몇 년 전 울릉도에서도 독도 접안에 실패했는데, 이번 천왕봉 일출도 실패다. 아무래도 한 번에 다 보여주면 서운하니 다음에 또 오라는 계시일까.


 어제저녁도 굶었는데 오늘 아침도 패스하고 바로 배낭 챙겨 하산하기로 했다. 아침부터 장터목 대피소에서 요리하는 것이 버겁게 느껴졌달까. 코펠부터 가스까지 무겁게 들고 왔는데 큰 쓰임보다는 등산에 큰 짐이 되었다. 아무래도 다음부턴 가벼운 짐만 챙겨 와서 산행의 과정을 즐기는 편이 더 좋을 듯하다.


 내리막길을 된통 겪고서야 다들 스틱을 가져온 이유를 확실히 알았다. 공포의 내리막길만 계속되었기 때문이다. 바닥에 돌이 빽빽해서 디딜 때마다 무릎에 상당한 충격이 갔다. 아빠가 스틱을 안 써서 뒤늦게 짚고 내려왔는데 아빠의 스틱이 없었다면 무릎이 고장 났을 것이다. 스틱을 사용해서 네 발로 몸에 받는 충격을 분산시키는 것이 관건이니 지리산 산행 시엔 꼭 스틱을 챙기시길 바란다.


 어제 지리산에 올랐을 땐 내려오는 분들을 만날 때마다 들었던 말이 생각났다. 거의 다 왔어요. 다 왔어요. 물어보지도 않았는데도 알려주고 싶으셨나 보다. 하루 먼저 지리산을 등반한 선배님들의 선의의 거짓말 덕분에 희망을 놓지 않고 끝까지 오를 수 있었다. 아빠의 탁월한 설계 덕분에 백무동-세속 대피소 구간은 폭포도 중간중간 있어서 쉬어갈 수 있어 오르막길이 지루하지 않았기도 했고.


 나도 하루 늦게 등반하는 분들에게 그런 응원을 해줄 수 있을까 기대했다. 하지만 장터목 대피소-백무동 구간에선 내리막길만 줄줄이 이어졌다. 그래서 올라오는 분들에게 안녕하세요 밖에 하지 못했다. 내게 끝없는 내리막길이 그분들에겐 끝없는 오르막길일 테니까. 안개가 자욱한 새벽의 등산길을 오르니 등산에 있어선 모르는 게 약이구나 싶다. 이번이 마지막 오르막길일 거야라고 주문을 걸며 계속 오를 뿐.


 첫 지리산 신고식을 지리산을 이미 N차 등산한 아빠, 엄마, 오빠와 함께해서 다행이었다. 지리산은 순례길과 많이 달랐다. 지리산 종주가 순례길 완주보다 어렵지 않을까 한다. 혼자 지리산을 왔다면 재미없었을 것 같다. 기쁨도 힘듦도 같이 나눌 가족이 있어서 고된 길이 하산을 마치자마자 잊혀졌다.


 난생처음 지리산에 도전한다면 이번에 다녀온 백무동-세석대피소-장터목대피소(1박)-천왕봉-장터목대피소-세석대피소-백무동 코스를 추천한다. 우린 백무동-세석대피소-장터목대피소(1박)-천왕봉-장터목대피소-백무동 코스로 등산했는데, 하산길이 내리막길만 펼쳐져서 무릎이 아프고 지루했다. 같은 길도 오를 때와 내릴 때 풍경이 다르기 때문에 백무동-세석대피소 구간을 올라갔다가 다시 내려가는 것이 더 나을 것 같더라. 다만 거리가 조금 더 늘어나서 등산시간이 늘어난다는 점이 단점이겠지만.


  지리산의 처음을 경험해 보니 오르지 못할 산이라는 막연한 두려움을 깼다. 다음 지리산을 기약해 볼 수 있는 용기가 조금은 생겼다. 다음에 또 지리산을 언제 갈지 모르겠지만 천왕봉의 일출을 못 본 것이 아쉬워서 또 오르게 될 것 같다. 부디 두 번째 지리산은 몸도 짐도 가볍게 와서 날아다니길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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