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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탱탱볼에세이 Oct 09. 2023

난생처음 지리산에 온 이유

등산의 이유를 찾다

 난생처음 지리산에 와봤다. 사실 내가 순례길을 네다섯 번 걸었다고 해서 걷기에 특별한 애정이나 취미가 있는 것은 아니다. 등산을 즐기는 편도 아니라 혼자라면 안 왔을 곳에 가깝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아빠였다. 이미 지리산을 20번 넘게 와본 아빠와 함께라면 첫 번째 지리산을 탐험해도 좋을 것 같았다. 아빠는 40대 초반에 조기축구회를 들어갔는데 체력이 달리는 걸 체감했다고. 그래서 이를 극복하고자 혼자 지리산 등산에 도전한 것이 아빠의 시작이다.


 그는 지리산을 한 해에 네 번이나 온 적도 있다고 한다. 대체 지리산이 어떻길래 아빠는 여길 자주 왔을까 궁금해서 따라왔다. 새벽 네 시에 집에서 출발했다.


 고속도로 마지막 휴게소인 지리산휴게소에 들렀는데 식당이 열지 않은 시각이라 컵라면을 끓여 먹었다. 휴게소 직원분이 뜨거운 물과 밥 한 공기를 내어주시는 친절을 베풀어주셔서 기분 좋게 하루를 시작할 수 있었다. 100명이 무당이 살았다던 백무동에서 아빠, 엄마, 오빠, 나 네 명은 각자의 배낭을 메고 산을 올랐다.


 엄마는 내게 순례길은 이렇게 오르막이 심하지 않냐고 물었다. 프리미티보길이랑 비슷한 느낌이다. 할딱 고개가 많기 때문이다. 아빠의 지리산이 내게는 산티아고순례길이 아닐까 싶었다. 기존의 경험에서 벗어나서 한번 미친 척하고 내 한계를 넘어보고 싶은 것이다. 더 나은 내가 되고 싶다는 작은 몸부림일지도?


 올라가는 길은 쉽지 않았으나 가만히 멈춰있는다고 해결되는 것은 없었다. 중간중간 시원하게 콸콸콸 흘러가는 폭포 소리를 들으며. 폴짝폴짝 제 갈길대로 뛰어가는 다람쥐와 고라니의 그림자를 좇았다. 빨강 노랑 초록 단풍이 들 듯 말 듯 밀당 중인 가을의 초입에서 우린 지리산에 문을 두드렸다.


 지리산에 올라가는 사람들도 내려오는 사람들도 많더라. 마주치면 서로 짧게 인사를 나눴다. 가족끼리 온 것이 보기 좋아 보인다. 여기 왜 왔니~ 가족끼리 왔나 보네. 스틱 없이도 오르는 힘이 좋으시다. 해맑게 올라오시네 나도 저런 때가 있었는데. 라며 순간순간 처음 본 사람들이 우리에 대한 시선을 듣는 게 재밌었다.


이번 추석 때 서울둘레길을 돈 멤버들이라 지리산의 등산풍경과 비교할 수 있었다. 서울둘레길은 특별히 서로 마주쳐도 인사하지 않고, 인사해도 시큰둥하단 인상이 들더라. 이 부분에 엄마도 공감했다.


서울둘레길을 4번 완주한 오빠는 오히려 인사 없이 각자 갈 길 가는 게 상호 간의 거리를 지켜주는 거라 설명했다. 낯선 사람에게 내가 해치지 않는 사람임을 알릴 때나 하는 게 인사라며. 이미 서울 사람들끼린 서로에게 위협적인 존재가 아님을 알고 있어서 굳이 인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신기하게도 한강에서 따릉이를 탈 때는 전문가용 자전거 타시는 분들이 먼저 지나가며 나름의 매너로 “먼저 지나갈게요”라고 말하셨다. 따릉이의 속도론 누군갈 추월할 일이 없어서 나는 그 말을 할 일이 없었지만. 시선을 외면하거나 앞서가거나. 눈과 눈을 맞춰 인사하는 일이 서울에선 참 쉽지 않단 결론에 이르렀다.


 지리산에선 반달가슴곰을 만날 수 있으니 조심하란 표지판이 눈에 띄었다. 반달가슴곰을 만나진 못했지만 지리산은 자연 그대로 모습이 살아있다는 반증이었다. 확실히 동물들은 자기가 여기 주인인 것을 잘 아는 듯했다.


세석대피소에 도착해 이른 점심을 먹을 준비를 했다. 식수대가 마련되어 있어 물을 뜨는데 가져온 페트병라벨이 지리산생수였다. 그래서 지리산 물을 직접 길러 온 상황이 유쾌하게 다가왔다.


산에서 끓여 먹는 라면에 대해 생각했다. 하긴 스위스 융프라우 가서도 신라면 컵라면은 못 참지 않는가. 때문에 코펠부터 가스까지 이고 지는 배낭 짐은 무거웠으나 덕분에 지리산의 자연을 등지고 내가 아는 맛있는 맛을 즐길 수 있었다. 다들 이 맛을 아는 건지 열 개 넘는 테이블이 빈 곳 없이 가득 찼다. 음식을 맛있게 먹기 위해 등산을 하는 걸까.


내겐 첫 지리산 산행이라 아빠가 일정을 당일치기 코스인데 1박 2일로 여유롭게 계획해 주셨다. 세석대피소에서 밥을 먹고 장터목대피소로 넘어왔다. 안개가 끼고 중간에 부슬비가 와서 네 발로 조심조심 기어 왔달까. 오늘 우리는 장터목대피소에 하루를 묵는다. 미리 온라인예약하고 체크인 가능 시간인 3시에 맞게 도착했다.


지리산은 인기가 좋아서 항상 온라인예약은 빠르게 마감된다고 한다. 남자는 1층 여자는 2층에 번호표를 배정받았다. 오두막집인데 구조가 신기했다. 아빠는 예전 방문 때랑 다르게 장판이 깔렸다고 단번에 알아채셨다. 침낭을 깔고 바닥에서 자야 하는 환경이다. 옛날엔 모포담요가 유료로 대여가 가능했는데 코로나 이후로 폐지됐다고. 챙겨야 할 짐이 하나 더 늘었다.


국립공원이라 따로 샤워실이 없다. 땀을 줄줄 흘리면서 올라왔는데 씻지 못한다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다. 꿉꿉한 기분에 할 수 있는 건 자는 것뿐이다. 낮잠을 잤다. 방바닥이 점점 뜨거워지더니 불가마가 되었다. 여기가 찜질방인가 싶더라.


낮잠을 잤는데도 저녁밖에 안 되었다. 화장실 가는 길목에 조리실에선 고기 굽는 냄새가 났다. 우린 챙겨 온 게 햇반과 라면, 몇 가지 반찬 정도인데. 생고기를 챙겨 온 집이 대단하게 느껴졌다.


고기 냄새가 나서 잠시 배고파졌지만 우리의 저녁식사는 생략하였다. 무거운 배낭을 메고 등산해서 다들 지쳤고, 설거지할 수 있는 환경도 아니라 귀찮고, 몸이 무거워지면 산에 올라가기 불편해서라는 복합적인 사연이 있었달까.


방에 사람들로 점점 가득 채워졌다. 지리산의 뜨거운 인기를 실감케 했다. 하루도 이렇게 불편한데 지리산종주하시는 분들은 어떻게 해내는 걸까. 자연을 보호하기 위해 쓰레기도 집으로 챙겨가고 거품 나는 오염을 방지하기 위해 세면대가 전혀 없는데 말이다. 지리산종주에 대한 관심이 식었다.


지리산을 오고 나서 내겐 씻는 것과 시원한 것이 중요하구나 깨달았다. 하루쯤이야 안 씻는다고 불편하겠나 싶었는데 내 땀냄새를 맡으며 뜨거운 방바닥에서 구워지는 느낌이 유쾌하지 않달까. 환경보호를 위해 살아가는 게 쉽지 않음을 하루이나마 체험한다.


오로지 지금 드는 생각은 내일 새벽에 무사히 일어나 천왕봉 일출을 볼 수 있을까이다. 희뿌연 안개가 가득한 지리산에서 또렷한 일출을 잠깐이나마 볼 수 있다면 지리산에 찾아온 보상을 기대한다. 이름 모를 누군가의 코골이 소리를 들으며 나는 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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