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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뜨고 TTGO Aug 21. 2019

한 번에 하나만 - 느린 여행을 떠나는 법

스리랑카 여행기

어떻게 하면 느린 여행을 할 수 있나요?


책을 출간하고 북 토크를 할 때였다. 강연을 마치고 질의응답 시간에 한 분이 질문을 던지셨다. 여행은 시간이든 재정이든 큰 맘먹고 가는 것이고, 가고 싶고 보고 싶은 것이 많은데 어떻게 하면 느리게 여행할 수 있는지 궁금하다는 이야기였다.

해주시는 이야기를 들으며 나도 깊이 공감했다. 맞다. 여행은 직업이 아닌 이상 우리는 자주 떠날 수도 없고 떠날 때마다 적지 않은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 휴양지만 가는 것도 아니며, 처음 가보는 나라에 가게 될 때도 많다. 지도 위 가고 싶은 곳에 별 표시를 하다보면 어느새 지도 위는 빼곡해진다. 벌써 마음이 급하고 다리가 뻐근해져 온다. 우리는 어떻게 여행의 속도를 늦출 수 있을까?


스리랑카 여행을 준비할 때였다. 우리 셋 모두 처음 가는 나라였다. 아무런 정보 없이 준비를 시작했지만, 우리는 이내 마르코 폴로처럼 그 신비로운 섬에 빠져들었다. 책을 찾아볼 때마다 리스트가 늘어났다. 가보고 싶은 곳이 너무 많았다. 그러나 여행이란 끝이 있기 마련이니, 제한된 일정에 맞추어야 했다. 우리는 머리를 맞대고 고심하며 꼭 가고 싶은 도시를 신중하게 선택했다. 지도 위에 위치를 표시하고 선을 그어 동선을 정했다. 그렇게 스리랑카의 지도 위에는 여덟 개의 별이 놓였다. 아이와 함께하는 여행에서 여덟 개의 도시라니. 더욱이 우리는 대중교통을 이용해서 여행할 계획이었다. 베이스를 밟고 질주하는 야구선수처럼 부랴부랴 달리기만 해야 하는 건 아닌지. 그러다 정작 꼭 하고 싶었던 것은 지나쳐버리고 속상하거나 아쉬워지면 어쩌지. 우리에겐 이미 그런 경험이 여러 번 있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조금 느슨해지기로 했다. 아주 단순한 계획을 세웠다. 한 도시에서 가장 하고 싶은 것 하나만 하기로.




네곰보. Negombo.

네곰보는 콜롬보 공항에서 가까워 스리랑카 여행을 시작하기에 좋은 도시다. 조용하고 크지 않은 어촌 마을이라 관광객이 많이 찾는 곳은 아니다. 우리는 단 하나의 이유로 이 도시를 찾아갔다. 남편이 책을 읽다가 이 작은 바닷가 마을에 있는 어느 카페를 발견했던 것이다. 해변에 책장이 놓인 카페가 있다고 했다. 사람들은 그 카페에서 모래에 발을 묻고 책을 읽는다고. 우리는 그 풍경 하나만 그리며 기꺼이 그 도시로 갔다. 스리랑카에서 맞이한 첫 아침에 우리는 그 풍경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아침 식사를 주문하고 기다리고 있으니 스리랑카 사람을 만나 이 곳에 정착했다는 이탈리아인 카페 주인이 직접 내리는 커피 향이 번져왔다. 카페의 이름은 라 돌체 비타. La Dolce Vita. 아, 달콤한 인생!




코스고다. Kosgoda.

네곰보를 떠나 코스고다로 향했다. 코스고다에는 바다거북 보호 센터가 있다. 이 곳에서는 바다거북의 알을 안전하게 보호하고 부화하여 아기 거북들을 다시 바다로 돌려보내는 일을 하고 있다. 우리는 바다거북을 위한 기부금을 내고 내부로 들어갔다. 갓 태어난 바다거북들 뿐 아니라 기형으로 태어나 바다에서 혼자 살아갈 수 없는 커다란 거북도 유유히 헤엄을 치고 있었다. 영화 '니모를 찾아서'에는 니모를 찾으러 가는 길에 니모 아빠가 거북들에게 도움을 받고 평소 니모가 궁금해했던 바다거북의 나이를 묻는 장면이 나온다. 이 곳의 거북이는 얼이보다 나이가 많다고 했다. 새끼 바다거북들은 어느 정도 자라면 바다로 돌려보내는데, 코스고다에 이틀을 머물렀지만 날짜가 맞지 않아 결국 그 장면은 보지 못했다. 아쉽지만, 다시 돌아올 이유를 남겨두는 것도 나쁘지 않지. 대신 우리는 일몰이 내리는 바닷가에서 헤엄을 쳤다.




골. Galle.

연말에 떠났던 여행이라 우리는 골에서 크리스마스를 맞이했다. 골에서는 여유 있게 머물 예정이었고, 우리의 계획은 단순했다. 크리스마스를 보내는 것. 그리고 스틸트 피싱(Stilt Fishing)을 보러 가는 것. 스틸트 피싱은 스리랑카의 전통 낚시법으로 바닷속에 긴 장대를 설치해서 그 위에 앉아 낚시를 하는 방식이다. 사진작가 스티브 맥커리의 사진을 통해 스리랑카의 상징 같은 장면으로 유명해졌다.

우리는 바닷가로 갔다. 현재는 어업보다 관광을 위한 목적으로 더 많이 사용한다고 하지만, 노련한 어부들은 바다 위로 뻗은 장대 위에서 금세 물고기를 낚아 올렸다. 뭍으로 내려온 아저씨는 곁에서 구경하던 얼이에게 물고기도 보여주고 작은 소라게도 한 마리 잡아주었다. 가장 하고 싶었던 일을 마치고 나서 느긋해진 우리는 구시가지에서 남은 시간을 보냈다. 골 구시가지와 요새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있고 중세 유럽 같은 풍경으로 유명하다. 우리는 돌로 포장된 거리를 걸어 요새를 둘러보고 아름다운 카페에서 아이스티를 마셨다. 우리를 둘러싼 풍경을 넉넉하게 누렸다.




엘라. Ella.

엘라까지 가는 길은 험난했다. 골에서 툭툭을 타고 기차역으로 가서 기차를 타고, 낯선 도시의 버스터미널에서 엘라행 버스를 찾아 탔다. 버스는 구불거리는 깊은 산길을 몇 시간 동안 달렸다. 버스 안에는 통로까지 사람이 가득했다. 남편은 운전석 바로 옆 비좁은 자리에 가방을 놓고 앉았고, 자리가 없어 얼이는 내 무릎 위에 앉혔다. 그렇게 네다섯 시간을 달리고 나니 다리에 피가 안 통하는 느낌이었다. 머리는 사람들의 팔과 짐에 달리는 내내 툭툭 부딪쳤다. 아침 일찍 떠났는데 해질 무렵에야 엘라에 도착했다. 따스한 햇살을 받으며 해수욕했던 골과 달리 산 깊은 곳에 위치한 엘라는 서늘해서 두터운 외투를 꺼내 입어야 했다. 설상가상 우리가 도착하자 굵은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다시 툭툭을 타고 버스가 들어갈 수 없는 좁은 산길을 따라 달리자 절벽 위에 위치한 숙소가 나타났다. 모기장이 둘러진 침대 하나로 꽉 찬 방에서 셋이 단잠을 잤다. 우리는 엘라에서 단 하루 머물 예정이었고, 이 길고 긴 여정은 다리 위를 건너는 기차를 보기 위함이었다. 다음날 아침, 여전히 비가 왔지만 뿌연 안개 너머 더욱 짙어진 산이 드러났다. 비가 와도 기차는 달렸다. 나인아치브릿지Nine Arches Bridge를 건너 선명하게 다가왔다가 이내 숲속으로 사라지는 기차를 우리는 몇 번이고 바라보았다.




누와라 엘리야. Nuwara Eliya.

스리랑카의 옛 이름은 실론. 스리랑카는 거대한 차 밭을 가진 실론티의 나라다. 기차를 타고 산악지대를 달리다 보면 산등성이에 차밭이 가지런히 펼쳐진다. 우리는 차 밭 사이로 천천히 달리는 기차를 타고 누와라 엘리야에 도착했다. 차를 마시기 위함이었다. 누와라 엘리야는 고즈넉하고 고풍스러운 도시였다. 엘리자베스 시대의 건축양식으로 지어졌다는 그랜드 호텔은 긍지와 품격이 느껴졌다. 우리는 호텔의 티룸에 앉아 애프터눈 티를 주문했다. 차 마시는 시간을 좋아해서 종종 애프터눈 티를 마시러 가는데, 누와라 엘리야에서 마셨던 애프터눈 티는 어느 곳과 비교해도 단연 손에 꼽힐 만큼 좋았다. 차도 맛있었고, 특히 티푸드가 훌륭해서 트레이에 놓인 모든 접시를 싹싹 비웠다. 얼이와 함께 차를 마시러 간 적은 많았지만 아이에게까지 따로 초콜릿 티를 준비해준 곳도 처음이었다.




캔디. Kandy.

캔디에는 아주 잠시 머물렀다. 일정에 넣을지 말지 고민했는데, 이동하는 경로에 위치해 있고 도시의 이름이 예쁘다는 이유로 우리는 무작정 캔디 기차역에서 내렸다. 캔디는 본래 붓다의 치아 사리가 봉납된 불치사로 유명하지만,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곳에 가기로 했다. 도시의 모든 곳을 돌아보기엔 시간이 충분하지 않아서, 우리는 시장으로 향했다. 어느 도시에서 머물 시간이 길지 않을 때, 시장에 들르는 것은 꽤 괜찮은 선택이다. 우리는 캔디의 생기와 활력과 온갖 색채를 시장에서 보았다. '먹고' '사는' 일들이 손으로 촘촘히 짠 바구니처럼 눈 앞에서 겹치고 덧대어졌다.




시기리야. Sigiriya.

시기리야에는 꼭 가야 하는 거대하고 묵직한 이유가 있었다. 세계 8대 불가사의라 불리는 곳. 드넓은 평원 한복판에 우뚝 솟은 바위산 위에는 천년 전에 만들어진 왕국의 흔적이 남아있다. 수많은 돌계단과 절벽 위에 매달린 비좁은 계단을 올라 우리는 그 거대한 고대도시의 흔적을 만나러 갔다. 고되고 긴 여정이었지만, 여행의 정점이라고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눈 앞에 놓인 한걸음 한걸음을 따라 걷다 보니 어느새 우리가 찾던 그곳이었다. 돌아보니 우리가 걸어온 길이 까마득했다. 어느 한순간에 이르기 위해 먼 길을 마다하지 않는 것이 여행 아니던가.




콜롬보. Colombo.

스리랑카의 마지막 도시는 수도인 콜롬보였다. 콜롬보에서 지낼 숙소는 일찌감치 정해두었다. 인도양을 바라보며 웅장하게 서 있는 골 페이스 호텔이 바로 그곳이다. 지어진지 150년이 넘은 이 호텔은 '죽기 전에 가봐야 할 1000곳' 중 하나로 선정되었다고 한다. 호텔은 웅장하고 아름다웠다. 내부에는 호텔의 역사가 담긴 박물관과 도서관이 있고, 박물관에는 호텔에 방문하고 투숙했던 세계적인 명사들의 사진이 걸려있었다. 객실 문에 거는 고리에는 이 호텔을 좋아했다는 마크 트웨인이 남긴 말이 새겨져 있었다. 여기가 콜롬보에서 우리의 목적지였다. 우리는 호텔에서 정원과 바다를 바라보며 식사를 하고 차도 마셨다. 도서관에서 책을 읽고 방에서 낮잠을 잤다. 수영장 옆 바에서 음료를 마시며 쉬기도 했다. 긴 여정의 마무리를 하기에 완벽한 곳이었다.




모두 여덟 개의 도시를 기차와 버스로만 이동하는 여정이었다. 스리랑카의 시간은 느리게 흘렀다. 기차는 풍경 속을 천천히 달렸고, 앞에서 다른 기차가 다가오자 우리가 타고 있던 기차가 멈췄다가 뒤로 물러나기도 했다. 자칫 늘어져 엉키거나 조급하고 빡빡해질 수 있는 여정에서 우리의 속도를 잃어버리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가장 중요한 것을 남기고 나머지를 덜어냈기 때문이었다.

한 번에 하나만. 더 보고 싶은 것을 보지 못한 적도 있지만, 목적지로 가는 길에 발견한 의외의 기쁨들도 있다. 우리가 더 많은 곳에 더 빨리 가는 것에 열중했다면 놓쳤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이번에 만나지 못한 스리랑카는 이 곳에 다시 올 이유로 남겨두었다. 

어떻게 느린 여행을 할 수 있을까? 인생이 그렇듯 여행에서도 내가 조절할 수 있는 속도는 내 걸음과 마음밖에 없다. 조금 덜어내 보니 걸음은 가벼워지고 마음은 넉넉해진다.

스리랑카는 인도양의 진주라 불린다. 진주는 유일하게 생명에서 만들어지는 보석이다. 우리가 만난 스리랑카는 들여다보는 면면이 제각각 다른 빛으로 농롱하게 빛이 났다. 화려한 보석을 겹겹이 두르는 것도 좋지만, 한 번에 하나만. 그것도 보석을 누리는 하나의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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