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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뜨고 TTGO Oct 15. 2019

9월의 쿠바에서 헤밍웨이를 만나다

책장을 펼쳤다. 익숙한 내용이었다. 이미 아는 이야기였다. 그런데 이내 문장 속으로 쑥쑥 빠져든다.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된다. 조각배를 타고 홀로 고기잡이를 하는 노인이 있다. 그는 팔십 사일 동안 바다에 나가서 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했다. 노인이 배를 타고 다시 바다에 나가 큰 물고기를 만나고, 그 물고기를 잡고, 다시 돌아오는 것이 이야기의 전부다. 한참 빠져들어 읽다가 책장을 다시 앞으로 넘겨본다. 제목이 눈에 들어온다. 천천히 소리 내어 읽는다. 노인과 바다. 어니스트 헤밍웨이.



아바나에서는 곳곳에서 헤밍웨이의 흔적을 만날 수 있다. 그는 쿠바 혁명 이후 미국으로 추방되기 전까지 20여 년간 쿠바에 머물렀고, 쿠바를 배경으로 쓴 '노인과 바다'로 퓰리처상과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헤밍웨이가 노벨상을 수상하면서 이 상을 받은 최초의 '쿠바 입양인'이라 행복하다고 말한 것은 유명하다. 그는 수상 후 메달을 쿠바에 기증했을 만큼 쿠바를 사랑했고, 쿠바인들 역시 그를 사랑과 존경의 의미로 파파 헤밍웨이라 불렀다고 한다. 그 흔적은 쿠바 곳곳에 남아있다.



가장 먼저 발견한 흔적은 '암보스 문도스 호텔 Ambos Mundos Hotel'이었다. 오비스포 거리를 걷다 보면 만나게 되는 이 호텔에서 헤밍웨이는 7년 간 머물며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를 썼다. 호텔 로비에서 그가 묵었던 방을 보고 싶다고 얘기하고 얼마간의 돈을 지불했다. 1931년 영업을 시작한 이 호텔은 현재도 운영 중이고, 헤밍웨이가 묵었던 방은 다른 객실과 함께 있다. 호텔만큼 나이를 먹었음직한 철제 엘리베이터 문이 덜컹하며 닫혔다. 철창으로 된 듬성한 문틈으로 엘리베이터가 서서히 층을 오르는 것이 보인다. 우리는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복도 끝 511호실 앞에 섰다. 문이 열리고, 크지 않은 방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방 한가운데 놓인 테이블과 타자기였다. 테이블 앞에 서니 커다란 창문이 보인다. 창문을 활짝 여니 오비스포 거리에서 들려오는 활기와 멀리 아름다운 풍경까지 한눈에 들어온다. 호텔 측 가이드는 이 방에 관한 설명 끝에 아바나 외곽에 헤밍웨이가 살던 집이 있지만, 내부에는 들어가 볼 수 없다는 이야기도 덧붙였다. 쿠방 오기 전 보았던 영화 '헤밍웨이 인 하바나' 속 바로 그 저택이다.



호텔을 나와 대성당 광장으로 향했다. 광장에 한참 머물다 바로 옆 골목으로 접어드니 사람들이 몰려있는 가게 하나가 보인다. '라 보데기타 델 메디오 La Bodeguita del Medio.' 헤밍웨이의 모히토로 유명해졌지만 최근에는 진위여부 논란이 있는 곳이다. 모히토는 쿠바가 원산지로 럼 베이스에 민트와 라임을 넣어 만드는 칵테일이다. 럼은 당밀이나 사탕수수를 발효시켜 증류하여 만드는 술이고 쿠바의 대표적인 특산품 중 하나다. 쿠바를 여행하다 보면 사탕수수 밭이 펼쳐져있는 풍경을 자주 보게 된다. 



우리는 바에 자리를 잡고 모히토를 주문했다. 아바나 클럽이라고 적힌 잔이 늘어선다. 바텐더가 투박한 손짓으로 재료를 툭툭 던져 넣더니, 짓이긴 민트 위로 럼을 콸콸 붓는다. 한 모금 마시자 강한 알코올 사이로 신선한 민트향이 생생하다. 잔을 들고 있으니 어디선가 리듬을 맞추는 소리가 들려왔다. 누군가 가게 구석에 놓여있는 작은 드럼을 장난스레 두드리자 떠들썩하게 이야기를 나누던 사람들이 하나 둘 웃으며 각자의 악기를 연주하기 시작한다. 웅성이던 소리가 겹치며 하나의 음악이 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연주하는 사람들도 듣고 있던 사람들도 너 나할 것 없이 들썩이며 몸을 흔든다. 쿠바를 여행하며 우리는 갓 만든 모히토와 음악에 익숙해졌다. 



아바나에서 머무는 동안 매일 일몰은 말레콘에서 봤다. 해가 질 무렵이면 절로 걸음이 바다 쪽을 향했다. 쿠바로 떠나기 전 가장 걱정했던 것은 날씨였다. 쿠바의 9월은 우기이고, 특히 이맘때는 허리케인이 자주 발생한다는 얘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오기 전 수시로 들여다본 날씨 어플에는 매일같이 번개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그러나 막상 쿠바에서 2주간 시간을 보내는 동안 비는 두어 번 잠시 쏟아진 것이 전부였다. 대신 우리를 맞이한 것은 강렬한 햇빛과 습한 공기였다. 한낮에는 거리를 오래 걷기가 힘들 정도로 뜨거웠다. 섬이라 습도가 높으니 공기 자체가 달궈지는 듯했다. 긴 오후가 지나고 해질 무렵이 되어야 열기가 가라앉았고 사람들은 거리와 말레콘으로 흘러나왔다. 말레콘의 파도는 이따금 높게 솟아올라 소나기 같은 소리를 내며 올드카가 달리는 도로 위로 거칠게 쏟아졌다. 방파제 위에는 낚싯대를 드리운 사람들이 서서 온몸으로 바닷물을 맞으며 고기를 잡고 있었다. 



우리는 어두워진 거리를 걸어 ‘엘 플로리디따 El Floridita’로 갔다. 사람과 음악으로 북적이는 틈을 비집고 바에 다가가 ‘다이키리’를 주문한다. 다이키리는 헤밍웨이가 이 곳에서 즐겨마셨다는 칵테일이다. 연달아 마시는 그를 위해 전담 바텐더는 항상 프로즌 다이키리를 두 잔 만들어주었다고 한다. 최근 방영된 ‘트래블러’에서 배우 류준열이 앉아 다이키리를 마시기도 했던 헤밍웨이 동상 옆자리는 각기 다른 언어를 쓰는 관광객들이 끊임없이 밀려와 사진을 찍고 있었다. 



다시 헤밍웨이를 만난 것은 아바나를 떠나는 차 안이었다. 우리는 트리니다드로 가고 있었다. 쿠바에서는 주로 비아술Viazul이라는 버스를 타고 도시 간 이동을 하게 된다. 이른 아침 출발한 버스는 늦은 오후 목적지에 도착할 예정이었다. 이미 몇 시간을 달려왔지만 아직 남은 길과 시간이 많았다. 정해진 장소에서만 유료로 와이파이를 이용할 수 있는 쿠바에서는 스마트폰도 무용지물이었다. 심심해진 나는 남편이 가져온 책을 잠시 빌렸다. 얼이도 내게 기대더니 소리 내서 읽어달라고 졸랐다. 여행을 오기 전 함께 그림책으로 된 ‘노인과 바다’를 읽었기 때문인지, 헤밍웨이 특유의 간결하고 하드보일드 한 문체 덕분인지 아이도 어렵지 않게 이야기 속으로 빠져들었다. 이미 여러 번 읽은 이야기였다. 그런데 어느 순간, 익숙했던 이야기가 전혀 다르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소년이 말했다.
“9월이라는 걸 잊지 마세요.” 
“큰 고기가 나오는 달이지.”
노인이 말했다.
(어니스트 헤밍웨이, ‘노인과 바다’ 중에서)



그때부터였다. 나는 ‘노인과 바다’ 속 배경이 9월이라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다. 그때부터 활자로 새겨져 책장에 누워있던 장소와 계절과 기온이 모두 생생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9월 이곳의 햇살이 얼마나 뜨거운지 이제 나는 알고 있었다. 노인이 배 위에서 견뎠을 태양 아래 나도 섰고, 그 파도가 내 옷도 적셨다. 문장이 온도를 가지고 살갗에 달라붙었다. 후텁지근하고 습한 공기 너머로 노인의 혼잣말이 들려왔다. 이야기는 단순하고 느리지만 힘 있게 흘러갔다. 노인은 다시 바다로 나갔다. 버스는 한참을 더 달렸고, 책은 지루하지 않았다. 버스 진동이 조각배를 흔드는 파도처럼 느껴졌다. 낚시에 걸렸지만 아직 물속의 물고기는 드러나지 않았다. 완전히 새로운 이야기를 읽는 것처럼 흥미로웠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헤밍웨이는 내가 좋아하는 작가가 아니다. 그의 다른 글을 읽으면서도 크게 와 닿았던 적은 없다. 그러나 이제 그의 책 한 권은 내 안으로 들어왔다. 9월의 쿠바를 배경으로 한 이야기다. 누군가 내게 그 이야기에 대해 묻는다면 나는 마치 내가 그 배 위에 있었던 것처럼 설명할 것이다. 그 햇살과 열기와 바다에 대해서. 


비단 책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여행을 하다 보면 이런 경험은 거듭 일어난다. 여행 서적은 사람들이 많이 가는 곳을 다루는 책이 많이 팔린다고 한다. 내가 가보지 않은 곳을 더 궁금해하고 찾아볼 거라고 생각했는데 의외였다. 하긴 내가 갔던 곳이 방송이나 책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sns에라도 보이면 그렇게 친근하고 반가울 수가 없다. 내가 맛본 음식, 좋아하는 음악과 향기, 내가 겪은 일, 내 눈 앞의 풍경. 우리는 그렇게 경험과 공감의 테두리를 넓혀간다. 그렇게 여행을 통해  ‘그 이야기’를 ‘내 이야기’로 만들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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