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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린종이 Aug 16. 2021

10년 후에도 변함은 없을 거야.

2000일째 다투는 중

 드라마 ‘최고의 사랑’을 이제야 정주행 했다. 아주 흥행한 작품임에 틀림없지만 드라마라면 딱히 흥미가 없었던 1인이어서 누가 나오는 건지도 잘 몰랐다. 주말까지 이어서 3일 동안 정신없이 달리고 엄청난 설렘과 행복을 느끼다가 남자 친구 얼굴을 보니 급하게 현실로 돌아온 기분이 들었다.


 나에겐 5년 반, 정확히는 2045일 된 남자 친구가 있다. ‘우리 언제 100일 될까?’ 하며 만나는 일 수만 세고 있던 게 엊그제 같은데 이젠 몇일이 됐는지도 모른다. 예전에는 오랜 만남에도 몇일 됐는지 꼼꼼하게 알고 있는 남자들을 보면 설레기도 하고 자상하다며 나도 그런 연애를 해야지 마음을 다잡았었지. 지금은 그게 무슨 의미인가 싶다.


 우리는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만났다. 전형적인 대학생들의 자연스러운 만남 중 하나였다. 네가 먼저, 내가 먼저랄 것도 없이 한 달도 되지 않는 썸을 끝내고 바로 연애부터 시작했다. 고백도 별거 없었다. 성격 급한 난 계획적이면서도 둔했던 남자에게 거의 대놓고 시그널을 보냈고, 나를 처음으로 집에 데려다주던 날, ‘나 너 좋아해.’라고 한 마디 들은 게 우리를 만들었다. 나는 자존심이고 뭐고 단 하루의 시간도 주지 않고 그 자리에서 그 남자 품에 안겼다. 날은 겨울이었고, 그 남자의 품은 이렇게 따뜻해도 되나 싶을 정도로 푸근했다. 키 187cm에 몸무게가 100킬로도 넘는 사람이기 때문에 안 포근하기도 어렵지만 아직도 세상에서 그 남자의 품이 가장 따뜻하고 편안하다. 이런 사람이 내 남자 친구다.


 자랑질이고 팔불출처럼 보일 수 있겠지만 이 사람과 2000일 넘게 만나면서 깨달은 한 가지가 있다. 키도, 얼굴도, 덩치도 연애에는 모두 쓸데없는 것이라는 걸. 오늘부터 1일을 선언한 후 나와 남자 친구는 하루가 멀다 하고 매일 만났고, 매일을 싸웠다. 서로를 관찰했던 시기 딱 한 달을 빼고는. 지금 떠올려도 그 한 달만큼은 아주 달콤한 꿈만 같았다. 남들은 1년은 서로 좋아서 싸울 일이 거의 없다는데 우린 처음 싸우기 시작한 게 30일도 안됐다. 썸이 짧았던 만큼 만나자마자 상당히 가까워졌고, 속 얘기도 털어놓으며 빛의 속도로 모든 걸 다 내비쳤다고 생각했다. 나를 이렇게까지 아는 사람은 서로밖에 없을 거야 할 정도로. 이제부터가 진짜 알아가야 하는 사이인 줄도 모르고 말이다.


 남자 친구는 정말 순하고 평온한 성격이지만 싸우기 시작하면 오기가 많았고, 난 까칠하고 감정 기복이 많은 사람이면서도 섬세하게 챙기는 것들이 많았다. 그래서 서로에게 부족한 것들을 채워주기도 하지만 사소한 것에서부터 맞지 않는 것들이 많았다. 원래 남녀 사이에서는 말도 안 되는 사소한 것들에서부터 싸움이 시작된다고는 하지만 이건 아니다 싶었다. 점점 갈수록 싸움이 격해지기도 했고, 나에게는 권태기라는 것도 찾아왔었다. 근데도 신기하게 여기까지 왔다. 우리 둘이 왜 아직도 너와 나가 아니라 ‘우리’인 건지 어쩔 땐 꿈인가 싶을 때도 있다. 이제는 싸우면 폭풍이 휘몰아치듯 서로 지칠 때까지 다투는 건 아니지만 우린 여전히 사소한 걸로 티격태격한다. 최고의 사랑이던 여느 로맨스 영화들은 보면 서로 좋아 죽던데 우린 왜 아직도 쌍심지를 켤 때가 많은 건지.


 25살에 만나서 이젠 앞 자릿수가 바뀌었다. 서른이 된 우리는 나름 어른답게 다퉈보려고 노력하지만 가끔은 그게 제어가 되지 않을 때도 있다. 여전히 1년에 한 번씩은 다투다가 울기도 한다. (남자 친구는 좀 더 자주 운다. 큰 덩치에 맞지 않게 눈물이 굉장히 많아서 미안하다면서 눈물을 삼키지 못한다.) 전에는 싸우다가 풀면 그만이었지만 작년부터는 결혼할 시기가 다가오면서 생각이 많아졌다. 아직도 생각 정리가 안됐지만 대체로 내 고민은 이런 것이었다. ‘우리가 결혼하면 애정 있게 살 수 있을까?’, ‘지금보다 더 알콩달콩하게 지낼 수 있을까?’, ‘좀 더 어른스럽게 대화로 풀어나갈 수 있을까?’. 모든 것들은 같은 고민을 돌려서 다르게 말한 것이다. 그냥 간단하게 말하면, 우리가 과연 서로 사랑하고 있는 걸까?


 여전히 정답은 정하지 못했지만 확실하게 아는 건, 나와 이 사람이 서로에게 불만으로 갖고 있는 행동 양식들은 10년 뒤에도 변하지 않을 거란 것이다. 고로 이건 한편으로는 지금 내가 내 남자 친구를 이해하려 하지 않고 인정하려는 노력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다행이란 생각이 든다. 반대로 내 남자 친구는 초반부터 날 있는 그대로 인정해줬기에 나에게 불만이 없다고 항상 그래 왔다. 그게 언젠가는 나한테 관심이 없어서 그런 거라며 고마워해야 하는 마음을 잘못 느낀 적도 있었지만 지금은 아주 고맙다. 그리고 너무 사회적인 나이에 이끌려 결혼을 숙제처럼 하려다 보니 이 사람에 대한 불만이 걱정과 불안으로 전해져 왔었는데 이 마음도 접기로 나 스스로에게 다짐했다. 그러고 나니 지금은 오롯이 우리 관계에 대해서 보다 객관적으로 접근하게 된다.


 당연히 5년 반, 2024일이라는 시간을 함께 보내온 현재도 하루가 멀다 하고 싸우는 건 아니다. 그냥 편하기만 한 서로의 모습이 걱정스러운 단계일 뿐. 일주일에 한 번 싸울까 말까지만 그 또한 불안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결혼해서도 알콩달콩하게 살고 싶은 마음이 나에겐 아주 크기 때문에 더 그런 것 같다. 10년 후에도, 50년 후에도 우리에게 서로를 실망시키는 태도들은 변하지 않을 꺼란 건 확실하게 알고 있는데, 이젠 서로 사랑하는 마음까지 똑같을 꺼란 걸 알게 된 순간도 왔으면 좋겠다. 그럼 그 둔한 남자가 나에게 ‘나 너 좋아해’ 하고 다가와준 것처럼 나도 ‘너와 결혼하고 싶어’라고 손 내밀고 싶다.



나의 최고의 사랑에게.

ps. 먼저 말해주면 고맙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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