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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린종이 Feb 10. 2023

예비 시아버지 생신상, 어떤가요?

지팔지꼰일까?

 어제는 예비 시아버지 생신이었다. 나에게 예비 시아버지란 조금은 특별하다. 아무래도 남자친구의 부모님께서 사실상 이혼을 하셔서 서로 별거 중이시기 때문에 아버님은 혼자 살고 계신다. 이제는 연애 7년차가 되어 내년이나 늦어도 후년에는 결혼을 하자고 우리끼리 계획을 하고 준비하고 있어서 나에게는 남자친구의 부모님이라기 보다는 예비 시부모님이 된 것이다. 그리고 아버님은 그동안 남자친구와도 연락을 잘 안하고 살아왔기 때문에 한 번도 생신을 챙길 기회도 없었고, 결혼을 생각하고 나니까 더욱 챙겨야겠다는 생각이 든 것도 있다.


 나는 마치 결혼하고 나서 시부모님의 첫 생신을 맞이하는 며느리처럼 생신상을 준비해 보기로 마음 먹고 거의 일주일을 메뉴를 정했다가 수정했다. 그리고 생신 바로 전날에 장을 봐서 퇴근 후 새벽까지 요리를 해 아버님댁으로 가져다 드렸다. 일을 마치고 나서 새벽까지 음식을 한다는 게 쉽지는 않았다. 눈에는 졸음을 안고, 계속 서서 요리를 하다 보니 발바닥까지 아파왔다. 아니나 다를까 엎친데 덮친 격으로 생리도 시작해 한도가 서는 줄 알았다. 그런데도 내가 정한 메뉴들은 몽땅 해보겠다며 생신상 메뉴를 하나씩 만들어냈다.


팥밥, 깻순볶음, 소불고기, 멸치볶음, 하트전, 잡채, 봄동겉절이, 오이무침, 굴미역국


 총 9가지의 음식들. 아버님이 혼자 사는 분이기도 하고 요리를 잘 해 드시지 못하기 때문에 나름 생각해 본 여러 반찬들도 했다. 손이 느리고 레시피도 찾아가면서 해야하기 때문에 엄청나게 오랜 시간이 걸렸다. 새벽 3시가 되어 요리는 마무리가 되었고, 짤막한 카드를 쓴 뒤 잠이 들었다. 다음날 출근 전에 배달을 해놓을 예정이었기 때문에 6시에 일어나 후다닥 머리만 감고 지하철에서 눈화장만 간단히 한 뒤에 아버님댁 문고리에 음식 가방을 걸어두고 왔다. 얼굴을 봽고 오고 싶었지만 아버님께서도 밤 늦게까지 일을 하시는 분이라 깨울 수가 없었다. (아니 사실 깨우려고 몇 차례 전화를 걸어보기도 했지만 깨지 않으셨다ㅎㅎ)


 음식을 걸어두고 다시 지하철을 타고 출근을 하는 길에 괜히 뿌듯해져서 아는 언니에게 음식 사진과 함께 톡을 했다. 그랬더니 잠시 뒤에 전화가 왔다. 


"너 참 대단하다~뭘 이렇게까지 미리 챙기느라 그래~"


 이 말을 듣고 싶어서 자랑한 건 아니었는게 기분이 좀 묘했다. 그 뒤로 벌써부터 이러면 나중에는 어쩌려고 그러냐는 둥 너무 니 몸을 괴롭히지 말라는 말이 덧붙여졌다. 언니는 나보다 7살이나 많고, 결혼한 지도 7년이나 된 사람이기 때문에 '아 진짜 내가 너무 오버했나? 나중에 더 바라시거나 내가 하는거에 별 감흥이 없어지고 당연해지면 어쩌지?' 라는 생각이 급습해왔다. 그러고 나서 다른 주변 사람들의 반응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대단하다고, 아버님이 감동하셨겠다고는 하지만 '왜 굳이 벌써?' 라는 반응이 항상 뒤따랐다.


 그리고 나도 사실은 처음에 준비하면서, 다 하고 뒤도는 순간까지도 그 생각을 하지 않았던 건 아니었다. 아 이런 게 지팔지꼰(지 팔자 지가 꼰다) 한다는 말인가? 별 생각이 다 들었지만 내가 7년동안 만나고 있는 남자친구의 아버님이기도 하고 실제로 몇 차례 만났을 때 항상 잘해주시니까 계속 마음이 갔다. 게다가 남자친구와 외모가 비슷하게 생겨서 그런지 더 마음이 쓰이기도 했고, 남자 혼자 산다고 생각하니 종종 내가 직접 반찬이나 요리를 해 먹을 때면 아버님 생각이 자주 난다. 그러다 보니 만날 때마다 반찬이고 옷이고 가볍지만 아버님께 필요한 것들을 챙겨 가게 되는데 그럴 때마다 듣는 소리기도 했었다.


 아직 나는 잘 모르겠다. 어떤 지인들은 혹시 아버님이 부자냐, 결혼할 때 뭐 해주시기로 했냐는 반문도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고 난 아버님 만난 지 4~5번 정도가 끝이다. 그저 내 남자와 똑 닮은 아버님이 혼자 사시기도 하고 나에게 잘해주시니 마음이 갔던 것일 뿐. 그래서 내가 정말 바보같이 사는 건가, 영리하지 못한 것인가 헷갈리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이 가는대로 하는 건 그냥 바보같든 무슨 이유에서든 진심은 사랑에서 시작한 것이라는 것 때문에 그걸 부정하기 싫었다. 이 말인 즉슨,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할 수 있는 표현은 재채기처럼 나도 모르게 무계획으로, 무의식적으로 나오는 거라서 계산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꾸 재채기처럼 나오는 마음을 괜히 주변 사람들의 말을 듣고 막으면서 찝찝하고 싶지 않다. 나중에 아버님이 나의 애정 어린 마음과 행동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날이 온다면 그때 차라리 '아버님 이젠 이런거 감동하지도 않죠?' 하고 우스갯 소리로 서운한 마음을 내비추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든다. 


뿌듯

 음식을 다 마치고 나서 너무나도 힘들었던 나는 생신 카드에 첫 생신이라 음식 챙겨드리는 거라고 써놨다. 요리를 좋아하지만 이렇게 많은 종류의 요리를 혼자 준비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KO 당한 것이다. 정말 앞으로 또 이렇게 계속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마음 같아서는 힘들어서 그만큼은 못할 것 같다. 아버님이 '첫 생신이라' 라는 멘트를 서운하지 않게 오래 기억하셨으면 좋겠다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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