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 잔뜩 나서 무작정 영화관에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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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링이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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솟구치는 분노를 잠재워줄 그런 영화가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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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상영 중인 영화가 암수살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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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가 더 커질까 걱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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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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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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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사와 살인범이 등장하는 스토리. 그런데 그 스토리 보다 그들 캐릭터가 인상적이었다.
형사는 유복한 집안의 둘째 아들. 살인범은 가정폭력범의 아들이다.
아버지에게 죽도록 얻어터지며 자란 살인범은 아버지를 죽이면서부터 연쇄살인범이 됐다.
사업을 하는 부친과 그 사업을 이어받은 형으로부터 언제든 도움을 받을 수 있는 형사.
그는 사업보다 범인 잡는 게 재밌어서 경찰이 됐다고 했다.
이 두 캐릭터의 팽팽한 대결. 처음에는 곱게 자란 형사가 밀리는 것 같았다. 살인범에게 이용당하는 듯 보였다.
돈 많은 형사가 살인범에게 돈이나 뜯기면서 재미로 형사 질을 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물론 아니다.
형사는 진심으로 피해자의 아픔을 이해한다. 마음에 휴머니즘, 사랑이 자리 잡은 인물이다.
반면 범인의 마음에는 분노밖에 없다. 아버지의 폭력, 그 반복되던 분노가 범인의 마음에 차곡차곡 쌓였다.
그리고 그것이 범인을 괴물로 만들었다.
형사의 성장배경은 영화에 설명돼진 않았지만 짧게 등장한 그의 아버지는 자상해보였다.
자식들과 골프를 치며 결혼해서 사는 게 여러모로 좋다고 말하는 아버지.
그런 아버지 밑에서 사랑받고 자랐기 때문일까? 버럭버럭 소리 지르거나 위악을 떠는 범인 앞에서도
좀처럼 화를 내지 않는 형사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사랑받고 자란 이와 분노 받고 자란이의 대결, 사실 게임이 안 된다. 형사는 애초에 싸울 맘도 없었으니까...
영화를 보기 전에 나는 잔뜩 화가 나 있었다. 누군가의 분노가 내게 심어졌기 때문이다.
분노를 내뿜은 사람은 속이 시원할지 모른다. 하지만 그가 내뿜은 분노는 사라지는 게 아니다.
그 분노를 고스란히 받아낸 이의 가슴에 뿌리내리고 더 커진다. 그렇게 내 가슴에 꽂힌 분노가 한 가득이다.
같은 일이 반복될 때마다 나는 그것들이 터질까봐 조심한다. 이런 노력을 해야 하는 내 자신이 서글프다.
그래도 해야 한다. 내 안에서 싹트는 분노를 잘라내야 한다.
그게 밖으로 터져나가면 또 누군가의 가슴에 분노가 심어지게 되는 것이므로 반복되는 악순환의 고리를 잘라야 한다.
암수살인은 실화를 바탕으로 만든 영화다. 실제 형사는 여전히 피해자를 위해 노력중이고,
실제 범인은 수감 중 자살했다고 한다. 잘 자란 이와 잘못자란 이의 확연히 다른 인생.
부모의 선택이다. 자식을 괴물로 키울지, 사람으로 키울지는
자식의 가슴에 사랑을 심을 것인가,
분노를 심을 것인가를 선택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