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까운 곳부터 떠나자

퇴사 여행 ver.1

by 성포동알감자

DAY 1

2016.11.22

김포공항 - 제주공항 - 바람벽에 흰 당나귀 - 고래고래 게스트하우스


서른 살이 한 달도 안 남은 시점에서 아무것도 아무 계획도 없이 퇴사했다.

나라는 혼란스럽고 조직문화는 도저히 아무리 절대 익숙해지지 않는다. 직장상사나 부모님과의 세대차이도 극복 못하겠다. 안정적이게 돈을 번다 한들 미래가 구부정하고 캄캄하다. 아마 이런 감정의 혼동 때문에 그만뒀다. 그러니 여유라도 찾자. 숨통이라도 틔자. 그런 연유로 여행을 찾아다니는 거겠지?

나의 정들었던 일들이여 동료들이여 안녕~~

퇴사 기념 여행지는 제주로 정했다. 비행기타고 싶었고, 해외는 조금 겁나고 그러니 제주다.

(이제야) 인생 처음 나 홀로 여행이다.

긴장했던 탓인지 출발 전 배탈의 위기도 왔지만 금방 장을 추스르고 제주에 도착했다.


사소한 행운으로 행복하다.

비행기는 비수기 평일이라 왕복 3만 8천 원의 티웨이항공. 부산 가는 것보다 싸다. 좋다. 무려 두 번째 줄에 앉아 넓게 편히 갔다. 빌린 차량은 모닝인데 렌터카 업체에서 아반떼로 업그레이드해 주었다. 급하게 예약한 게스트하우스도 깨끗하고 아늑했다. 사소한 행운으로 인해 나 홀로 여행이 행복할 거란 믿음이 생겼다.


가고 싶었던 빈티지 느낌의 카페 <바람벽에 흰 당나귀>에 들렀다. 다행히 숙소 근처라 더 좋았다.

시린 장을 추스리기 위해 민트차를 시켰다. 그리고 여유를 즐겨야지 ^_^ 했으나 머리 속은 다음 날 일정과 첫 여행의 불안감으로 점령됐다. 바다는 안 보고 휴대폰으로 다음날 숙소, 일정만 생각했다.

3시간은 후딱 지나갔고 정해진 것 없이 두통만 얻었다.

고래고래 게스트하우스 1인 실과 거실. 여유롭게 영화 한 편을 다 보고 잠에 빠지려 했는데 바람소리가 어찌나 크던지. 무섭더라고. 결국 잠을 설쳤다.



DAY 2

2016.11.23

고래고래 게스트하우스 - 비자나무숲 - 카페 샐리 - 쇠소깍 - 공천포 - 카페 숑 - 공새미 59 - 넙빌레 하우스

차갑지만 시원하고 맑은 바람, 바람이 나뭇잎을 스치는 소리, 청명한 하늘

나무 정령, 바람 요정, 산신령, 온갖 영적인 능력을 가진 것들에게 삶에 찌는 뇌와 마음을 정화시켜달라고 기도했다.

비자림 나무를 보니 왕좌의 게임에 피눈물 흘리는 나무도 생각나고, 숲을 걸으니 다음엔 함께하는 여행이 좋을 것 같다는 생각도 하고, 여전히 사념은 날 떠나질 않는구나.

비자림을 둘러보고 나니 몸도 춥고 배도 고프고 점심을 먹기로 결정했다. 생각나는 가게도 없고 검색하기도 귀찮아서 인스타로 봤던 카페 샐리의 새우 떡볶이를 먹기로 결정.

기분 좋은 드라이브. 삼나무길도 지나고 억새풀 길도 지나고 해안도로도 지나고. 운전을 정말...... 싫어하는데 이런 풍경이라면 운전할만하다.

1시간 반쯤 달려와 <카페 샐리>에 왔다. 사실 인근 식당을 갈까 고민도 했는데 비수기라 이곳 말곤 문을 다 닫았더라고. 그리고 정말 최악의 떡볶이를 맛봤다. 인스타를 믿지 말자!!!! 나에게 냉장고 맛 딱딱한 떡을 선사하다니 웩!!

테러의 떡볶이를 먹은 뒤 도망치듯 근처 쇠소깍에 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날 위로하는 고양이를 만났다.

자유 영혼 고양이가 인상 깊게 남은 나의 쇠소깍 풍경.

고독 타임은 1분

쇠소깍에서 공천표 바다로 넘어왔다. 주차장 차들이 주차를 이상하게 해놔서 역시나 이상한 주차를 했다. 도시와 다르게 이상한 주차로 욕먹지 않아서 좀 좋았다. 그리고 생각정리를 위해 바다를 바라보았다. 아마도 고독을 가진 것 같았는데....... 잠이 들어 있더라고. 쉽게 생각을 잠재워버렸다.

잠에서 깨어 근처 <카페 숑>으로 갔다. 노리플라이와 언니네 이발관 음악이 나오는 작고 아늑한 카페

푸들 주인, 비글 주인, 똥깨 주인, 동네 사람들이 삼삼오오 수다 떨며 간식타임을 갖는데 부럽더라. 느긋해 보이고. 사실 혼자라 말할 사람도 없어 같이 있는 모양이 부러웠던 것 같다.

오늘 저녁은 돼지고기덮밥이다. 친구가 밥 챙겨 먹으라며 제주 먹방 지도를 보내주었다. 다행히 숙소 근처에 맛집이 있길래 걸어서 방문한 <공새미59>

저녁 오픈 시간보다 일찍 왔더니 고양이들이 못 들어가게 한다. 똑똑한 녀석들 ㅋㅋㅋㅋㅋ

덮밥은 초등학생 입맛인 내게 딱이었다. 밥도 찰지고 제주에서 먹은 음식 중 가장 따뜻했다.

멋있지만 어딘가 스산한 오늘의 숙소 <넙빌레 하우스>

혼자 제주를 누비는 여행객들 셋이 같은 방을 쓰게 되었다. 제주도에 3개월째 거주하며 제주도 투어 중이라는 20살 대구 소녀. 육아와 일에 지쳐 시댁에 아들 둘을 맡기고 탈출한 주부님. 나이와 처지는 다르지만 서로의 고민과 미래에 대해 이야기했다.

말하니까 좋다

대화를 나누면서 위로가 되더라. 20살 아이보다 나이는 많지만 그 아이보다 나은 재력(?)과 운전실력이 있고, 주부님처럼 사랑스러운 자식과 안정된 가정 따윈 없지만 나에겐 자유와 자유와... 남자를 많이(?) 만날 자유가 있더라고. 하고 싶은 거 다 하자!!! 하하하!!!



DAY 3

2016.11.24

넙빌레 하우스 - 김영갑 갤러리 - 섭지코지 - 성산일출봉 - 성산 진미식당 - 월정리 - 달비치 - 고래고래 게스트하우스
오늘은 동쪽 관광지 투어다!

남쪽에서 동쪽 해변을 따라 다시 올라가기로 했다. 애초에 왜 쭉 내려온 건지는 알 수 없지만 나 홀로 여행이니까 그저 마음이 내키는 데로 차 굴러가는 데로

몸 상태도 최고다. 날씨가 최고거든^_^

제주도에서 꼭 가고 싶었던 <김영갑 갤러리 두모악>에 왔다. 그가 사랑한 바람, 오름, 제주의 인적 드문 자연을 느끼고 싶어서!

그의 작품을 판단하기엔 예술적 감성이 부족해서 잘은 모르겠지만 영혼을 담으려 한 노력과 호흡하려 했던 모습은 정말 감동스러웠고 그의 열정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자연 물아일체의 삶은 이해하지만 아직 세속적인 나는 도시의 편안한 삶과 북적이는 사람들이 좋은 것 같다.

김영갑 갤러리에서 섭지코지로 이동했다. 오늘은 중국인 관광객 코스프레 한 날. 수학여행객 인척 한 날.

동쪽이 유명한 이유가 있구나. 비록 바람이 싸대기를 날리고 눈을 찌르는 햇살이지만 구름과 바다가 아름다워 가는 길마다 멈추게 된다. 고맙다 날씨야. 아메온나에게 파란 하늘을 보여줘서

맑은 날 성산일출봉은 처음이야

역시 바람 싸대기로 앞을 보기 힘들었지만 성산 꼭대기는 장관이었다. 게다가 맑은 날은 처음이다. 제주가 한눈에 보인다. 하늘, 구름, 바다, 파도를 담아가자. 그리고 여유와 대자연의 즐기려 했는데 중국인들이 사진 찍는다고 비키래! 아...............

늦은 점심으로 성산일출봉 근처 성산 진미식당에서 2만원짜리 오분자기 뚝배기를 먹었다. 가게 할매가 내가 정말 그지 같아 보였는지 '오분자기뚝배가 주세요' 했더니 '2만원인데.....' 라며 말끝을 흐리셨다.

늦은 점심을 먹고 월정리로 향했다. 구름이 예뻐서 더욱 좋은 날.

혼자 찍은 사진을 남기고 싶은데 셀카봉도 삼각대도 없어 지나가던 커플에게 찍어달라 했다. 그리하여 센과 치히로의 가마오야지지같은 사진이 탄생

해변 산책 후 바람을 피해 우연히 들어온 <달 비치 카페> 2층에서 보이는 바다와 조명과 인테리어와 어우러져 예쁜 장면을 보여주더라.

신나게 돌아다녔더니 다리가 후들거렸다. 오늘도 운전하느라 돌아다니느라 수고하였다.



DAY 4

2016.11.25

고래고래 게스트하우스 - 김녕세기해변 - 제주 국제공항 - 김포공항
올레길을 걷다

첫날 묵었던 고래고래 하우스로 돌아왔다. 근처가 김녕세기해변이고 금속공예작품으로 이어진 올레길이 있다고 숙소 사장님이 추천해 주어 이곳을 마지막으로 둘러보고 올라갈 채비를 하였다.

올레길을 마지막으로 나 홀로 제주여행이 끝났다.

혼자 여행은 힘들었다. 챙겨주는 사람이 없으니 준비할 것도 많고 생각보다 많이 외로웠다.

특히 밥 챙겨 먹는 게 가장 힘들었다. 밥을 챙겨 먹어야 열심히 돌아다니는 건데 굶어버리니까 몸도 힘들더라고. 하지만 마음 가는 데로 돌아다니니 자유롭더라. 남 눈치 볼 일이 없더라. 돌아다니다 보니 결국 외롭고 쓸쓸한 감정들이 무뎌지더라. 마지막은 항상 수고했다는 셀프칭찬.

가장 큰 장점은 화장을 안 해도 된다!

거울에 대한 예의로 눈썹만 그리고 다녔다. 밍숭 밍숭 못난 얼굴로 자연인처럼 돌아다녔다. 다음 여행을 기약하며~

안녕 제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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