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의식의 세계 14

죽은 자와의 대화

by 김통

1년 남짓 공황 장애자로서 생활을 하면서 느낀 건 내 공장이(내 공황장애의 ‘애칭’)이는 세 가지를 제일 싫어한다.(혹은 좋아한다, - 좋아서 팔팔 뛰는 건지, 싫어서 팔팔 뛰는 건지 알 수는 없다.) 많이 먹기, 많이 운동하기, 낮잠 자기. 이런 날이면 꼭 발작이 일어난다. 발작은 바로 나타나기도 하고, 밤에 슬금슬금 찾아와 나의 장기를 짓누르기도 한다. 어제는 후자 쪽이었다. 그리고 어제 하지 말라는 세 가지를 다 했기 때문에 조금은 예상해서 인지 딱히 크게 놀라진 않았다. 역시 사람은 모르고 당하는 것보다 알고 당하는 게 덜 당황스럽다.


오랜만에 많이 먹었고, 자전거를 좀 탔으며, 두 가지가 결합된 나른함으로 낮잠을 잠시 잤던 것뿐이다. 그 녀석은 그 꼴을 못 본다. 아니면 너무 좋아서 날뛰는 걸 수도 있다. 어느 쪽인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하지만 난 1년 동안 체득한 세 가지 규칙을 다 어겼고, 고스란히 그 대가는 밤에 자면서 치르게 되었다.


아버지는 내가 초등학교를 졸업하기 직전, 겨울방학 무렵 심장마비로 돌아가셨다. 어떤 유언도 없으셨다. 그저 여느 날처럼 난 정말 ‘“안녕히” 주무세요.’ 하고 내 방에 와서 잤을 뿐이다. 하지만 아버지는 아침에 깨어나지 않으셨다. 아침에 나를 깨웠던 건 엄마의 통곡소리. 그렇게 난 아버지와 이 세상에서 이별을 했다. 말 한마디 주고받지 못한 채.


어제 아버지가 꿈에 나왔다. 아버지는 늙었다. 더 이상 40대 아버지가 아닌, 흰머리가 희끔희끔 보이는 약간의 젊은 노인이지만 정장을 입고 계셨다. 내 기억에 아버지는 출근할 때 늘 정장을 입고 가셨다. 하지만, 아무리 얼굴이 늙었다 할지언정, 나는 아버지를 알아봤다. 나는 아빠하고 불렀다. 아빠는 “오 그래. 잘 있었니?”라고 대꾸해주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내 이름은 기억하지 못하였다. 아버지는 이제 간다며 어디론가 바쁘게 가려하셨다. 난 쫓아갔다.

“거기 생활은 어때요?”라고 난 큰 소리로 외쳤다. 아버지는 뒤를 돌아보셨고, “여기도 다섯 가지의 삶이 존재해.” 하셨다. 난 “행복하세요?”라고 물었고, 아버지는 “여기서 가정을 이루고 살고 있어. 자식이 셋이야. 아들도 있어.” 라며 약간은 자랑스러워하셨다. 아버지는 평생 자신이 아들이 없는 것을 두고두고 안타까워하셨던 분이다. 난 뜬금없이 “거기서도 죽음이 있어요?”라고 물었고, 아버지는 “물론, 있지, 다섯 번 정도 죽었다 다른 삶을 살게 되지.”

난 호기심에 “그럼 그 이후에는 어떻게 되나요?”라고 물었으니, 아버지는 답을 해주지 않았다. 난 “직장을 그만두고 싶어요. 정말 지긋지긋해요”라고 칭얼거렸고, 아버지는 그러면 안된다 답해주었다. 이유는 듣지 못했다. 난 화제를 돌려, “외할머니는 만나보셨어요?”라고 물었다. 거의 십 년 전에 돌아가신 외할머니 말이다.

아버지는 “그 분과 나는 마지막 생이 달라서 길이 달라. 그분은 마지막을 자연 속에서 함께 사셨잖아. 그런 분들은 더 높은 쪽으로 가셔. 자연과 함께 생활하다 생을 맞이한다는 건 고귀한 일이거든.”


그랬다. 외할머니는 화천의 어느 시골 마을에서 마지막까지 텃밭을 가꾸며 생활하셨다. 그렇게 아버지는 가셨다. 난 그래도 아버지가 그쪽에서 행복하게 사시는 것 같아서 보기에 좋았다.

죽은 자들은 말이 없고 남겨진 자들은 슬픔을 평생 떠안으며 산다. 그건 그리움의 슬픔일 테고, 원망의 슬픔일 테고, 아쉬움을 슬픔일 테다. 하지만, 죽은 자는 행복하게 자신의 영혼(?)을 개척하며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죽은 뒤에 일은 아무도 모르니 말이다. 아니면 물리적 그대로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일 수도 있다.

죽음은 탄식할만한 슬픔이지만 동시에 축복해야 할 일인지도 모른다.


이란에서는 장례식에서 만큼은 여성들의 참여와 과도한 ‘몸짓’ 등이 허용된다고 한다. 특히 유명인이 죽을수록 많은 이들이 나와서 ‘애도’하는 이유는 여성들이 ‘공공장소’에 제한 없이 나갈 수 있다는 것도 하나의 이유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이러한 점은 아베 베르부르크가 지적한 ‘사회적 감정의 전달체’로서의 ‘몸짓’에 부합하는 형태라 할 수 있다.


디디 위베르만은 고대 장례식의 애가(哀歌)가 ‘'수백만 초의 삶이 사라지는 순간을 몇 개의 노래를 통해 표현하여 ’ 잔존‘하는 것’'이라 지칭했다.


결국, 장례식은 수백만 초의 삶을 살아남은 이들이 정리하는 과정인 것이다. 한 사람의 삶을 2박 3일로 정리하여 끝낸다는 건 아이러니한 일일 수도 있지만, 그들을 애도하는 ‘몸짓’들은 그들이 죽은 이에 대해 표현하는 유일무이한 방법이며, 어떤 이들은 ‘애도’의 형태를 띤 자신들의 잠재된 표현 방식일 표출하는 것일 수 있다.


추석이 다가오고 있다. 당연히도 이번 추석 때도 나는 저 멀리 선산에 묻힌 아버지 묘소에 갈 수 없는 몸과 마음이다. 아버지가 이런 내 찜찜한 마음을 위로해주고 싶었나 보다. 나는 잘 살고 있으니, 열심히 일하라고.

그래서 그런지 출근시간에 늦을까 봐 조마조마해하며 잠을 설쳤더니 다시금 명치가 뻐근하게 아파온다.

잠에서 깨고 나서야 더 이상 출근할 필요가 없다는 걸 깨닫고 안도의 한숨을 내신다.

직장을 그만둔다고 하면, 그래 너 하고 싶은 대로 하며 살아라 하고 쿨하게 말해주는 부모였으면 더 내 마음이 편했겠구먼... 그러나 우리 아버지 세대들이 그렇듯이, 일은 열심히 해야 하나보다.

참고로, 아버지의 죽음은 과로사로 인정이 되어서 노동부 산재 판결에서 승소도 받았다. 그렇다고 나까지 죽을 만큼 일하고 싶지는 않다. 다시 아버지를 만나면 물어봐야겠다.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면 왜 안되는지.....” 물론, 언제 다시 만날지는 모르겠다.

사진 출처 : https://english.alarabiya.net/en/News/middle-east/2020/01/05/Soleimani-funeral-procession-eulogist-puts-prize-on-Trump-s-hea 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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