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와 전염병
(며칠 전 꿈이다.)
글을 작업하는 데 있어 전문적인 강좌를 들어야 함을 느껴 유명한 강사를 찾아가 그녀의 강의를 들었다. 그녀는 나에게 동성애에 대한 이야기를 써야 함을 강요했다. 나는 고민하다가 결국 예전에 구상하다 말았던 중년 여성들 간의 로맨스에 대한 이야기를 써내려 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어느 순간 난 가톨릭 사제들에게 쫓기는 신세가 되었다. 동성애에 대한 이야기를 썼다는 죄목으로 말이다. 그렇게 숨 막히게 헐떡거리며 골목길, 어느 건물의 미로 같은 길들을 달리고 달리며 쫓아오는 자들을 뿌리쳤다. 너무 심하게 달리다가 숨을 헐떡거리며 잠에서 깨어났다. 어느 시대인지도 도통 모르겠고, 어느 나라였는지 조차도 분간되지 않은 꿈이었다.
몇 가지의 고민과 사건(?) 등이 어우러진 꿈이긴 했다.
사실, 글을 쓰기 시작한 지는 몇 달 되지 않는다. 물론 평생 글을 안 쓴 것은 아니다. 가끔 책을 읽고 독서감상문 정도의 글도 끄적거리고, 페이스북에다가 주절이 쓴 적도 많으며, 개인 홈페이지도 나름 운영하고 있으니 글과 담을 쌓고 산 적은 없다. 하지만, “글을 써야 한다”는 강한 신념으로 글을 쓰기 시작한 지는 불과 6개월 남짓 된다. 그 전에는 그저 생각나는 대로 갈겨쓰고, 또 잊고, 일상생활을 시작했다면, 어느 순간(몇 가지의 사건이 있긴 했지만) 이후, 글을 쓰지 않으면 뭔가 불안해지고 답답해지는 경향이 부쩍 잦아졌다.
그래서 그 시점을 기점으로 ‘글을 쓴다’라고 혼자 명명하며 지내고 있다. 그러던 와중에 소셜 미디어에 접속할 때마다 부쩍 <글쓰기 강좌>라는 것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클릭하고, 그들의 커리큘럼을 살펴보다가 다시 창을 닫고 이런 일련의 과정들이 반복되다 보니 어느 순간 “글쓰기 과정을 본격적으로 들어야 하나?”라는 물음이 머릿속에 남게 되었다.
그들의 커리큘럼은 대부분 ‘독자들이 좋아하는 글쓰기’ 혹은 ‘잘 팔리는 글 쓰기’ 등의 상투적인 문구들로 장식되어 있는데, 딱히 내가 전업작가도 아닌데 이런 ‘글쓰기 강좌’를 수강해야 하는가 하는 의문이 들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전문적인 ‘글쓰기’ 훈련(?)이라고 하면 좀 어감이 어색하지만 글쓰기에 대한 기초 지식 조차 전무한 채로 계속 글을 쓰는 게 맞는가 하는 고민도 계속하고 있는 와중이었다.
물론 미국의 유명한 소설가였던 셔우드 앤더슨은 “예술의 목적은 팔릴만한 그림을 만드는 것이 아니다. 자신을 구원하는 데 있다.”라는 말을 남겼다. 난 그의 책을 읽진 않았지만, 그의 말엔 전적으로 동의한다.
내가 예술활동을 하는 건 아니지만 나는 글을 쓰면서 나 자신의 무의식을 해석하고 해수면에 가라앉아 있는 보물을 끌어올리듯 하나하나 수면 위로 건져내면서 그것들을 쓰다듬어 주고 버릴 건 버리고 창고에 넣을 건 넣는 기분으로 글을 쓰고 있다. 이건 독자들에게는 순전히 불친절한 글쓰기임에 확실하지만, 나 자신을 들여다보는데 가장 정밀한 현미경인 셈이다.
또한 그 유명한 슈퍼 마리오 캐릭터를 만들어 낸 미야모토 시게루 역시 비슷한 말을 하긴 했다. “중요한 것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만들어내는 것이지 남들이 기대하는 것을 만드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이다.
앤더슨의 말이나, 시게루의 말이나 일맥상통하는 지점은 요새 유행하는 <글쓰기 강좌>에 나오는 ‘잘 팔릴만한, 독자들이 좋아할 만한’ 글을 쓰는 게 아니라, 본인이 진정으로 우러나오는 글, 자신의 글을 쓰라는 소리인 듯하다. 그래서, 그렇게 고민의 고민을 며칠 거듭한 끝에 <글쓰기 강좌> 듣는 건 일단 보류하기로 했다. 그냥 불친절한 글쓰기는 계속 이어질 것 같다.
그게 나의 무의식에 깊게 남았는지, 나는 현실과 다르게 꿈속에서 대신 글쓰기 강좌를 들었다. 희한하게 그녀는 유명한 스페인어 강사이다. 요 며칠 스페인어 공부를 뜸해서 그녀가 대뜸 글쓰기 강사로 등장했나 보다. 내가 스페인어 공부를 뜸한 것에 대한 죄책감을 심어주려고.
그런데 왜 그녀는 나에게 동성애에 관한 글을 써보라고 했는지는 쉽게 짐작이 간다. 그건 요새 내가 LGBTQ 아트 히스토리 강좌를 온라인으로 수강하고 있기 때문이다. 관련해서 영화 몇 편을 보았는데 하나는 로빈 캉필로 감독의 120 BPM, 유명한 LGBTQ 활동가였던 래리 크래머가 각본을 쓰고, 1985년 뉴욕에서 초연을 보였던 연극을 2014년 HBO에서 TV 영화로 만들었던 동명의 작품 ‘더 노멀 하트(The Normal Heart)’이다. 이 TV 영화에는 마크 러팔로, 짐 파슨스, 줄리아 로버츠 등 유명 배우들이 꽤 출연하였다.
두 편의 영화는 서로 다른 지역, 프랑스 파리, 미국 뉴욕이라는 지리적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근간은 같은 맥락 속에 놓여 있다. 그건, AIDS라는 질병에 대한 차별 어린 시선, 두려움, 무시, 경멸 등으로 점철된 사회적 함의 속에 놓인 ‘소수자’들에 대한 ‘차별’에 대한 이야기이다.
물론, 120 BPM 은 보다 현실적인 커플의 모습을 상정함으로 해서 등장인물들과의 일체감을 부여해주는 한편, ‘더 노멀 하트’는 1985년의 초연을 보지 못한 상태이기 때문에 단정 지을 순 없지만, 이름도 명명되지 않은 질병과 그 커뮤니티 안의 갈등, 사회의 냉대, 정치적 무관심 등을 보다 객관적인 관점에서 보여주고자 한다.
120 BPM에서 나온 ‘액트업(ACT UP)’ 은 실제로 많은 다국적 제약 회사들을 위협하고 테러 행동을 가해함으로 해서 그들이 유의미한 AIDS 치료제를 발표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해주었다. 그전에는 이미 치료제가 나왔음에도 연구 결과 발표를 차일피일 미루고 있었다고 한다. 이것 역시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함의에 따른 상관관계가 전혀 없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 영화의 핵심은 액트업 사람들의 천진난만함과 진지함이 공존하는 테러 현장도 아니고, 커플들의 슬픈 사랑도 아닌, ‘죽음’에 맞춰져 있다. 그 ‘죽음’에 대비하여 밝게 빛나게 하는 장면은 퀴어 퍼레이드에 참가하여 신나게 춤을 추는 션의 모습일 것이다. 경시할 만한 죽음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이 주류사회 구성원으로서 대접을 받든 못 받든, 그들은 그들의 세계를 살고 있는 그저 평범한 ‘사회인’이자 존중받을 만한 마땅한 권리가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숭고하거나 하찮은 죽음은 존재하지 않는다. 죽음의 무게는 누구에게나 동등하게 부여될 따름이다.
그건 현재 지금 세계 여기저기를 관통하고 있는 ‘바이러스의 무게’를 보면 알 수 있다. 알 수 없는 전염병의 공포는 전염병 이상의 ‘공포’를 자아낸다. 원래, ‘미지’와 ‘무지’가 더 무서운 법이다. 현재의 공포와 당시 명명되지 않은 AIDS의 공포를 같은 병렬 선상에서 놓고 비교할 수는 없겠지만, ‘전염병’이라는 것은 언제나 홀로 가지 않는다. ‘전염병’은 정치적 논쟁을 이끌어내고, 사회적 단절을 만들어 내며, 의학의 발전을 거듭시킬 뿐이다.
그 속에서 우리는 보이지 않은 ‘공포’와 싸워야 하며 정치적 논쟁에 따른 비용 등을 지불하고 있다.
어찌 되었든지 간에 나는 꿈속에서 동성애에 관한 로맨스를 썼고, 위협에 맞서 도망쳐야 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2013년부터 직간접적으로 동성애자를 포용하는 발언을 해왔다. 그러나 뿌리 깊은 보수세력들은 어디에나 존재하기 마련이며, 난 그들을 피해 도망쳤다. 그들과 맞서 싸우지 못했다. LGBTQ의 권리를 옹호한다고 생각하고 그것이 당연한 이치라고 여기지만, 난 아직 주류 사회에 대항할 힘은 부족한가 보다.
‘글쓰기’에서 ‘LGBTQ’, ‘도주’로 이어진 며칠 전 무의식의 세계는 ‘전염병’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미생물의 바이러스이건, 실체가 없는 바이러스이건 우리 사회에 항상 도사리고 있다는 걸 깨닫게 해주는 것 같다. 주류 사회에서 정해놓은 정치적, 사회적 규범들을 어긋날 때 우리는 그것들을, 그들을 ‘바이러스’ 만큼이나 혐오하는 경향이 있으니 말이다
120 BPM 영화 포스터 (영어 제목은 120 battements par minute) -사진 출처 : 네이버
<더 노멀 하트> 중 한 장면 : 1980년대 초반에는 AIDS라는 명칭 대신 Gay Cancer라고 불렸다고 한다. 얼마나 차별적인 명칭인지 명확하게 드러나는 장면. - 사진 출처 : IMD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