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현의 자유와 정체성
어제는 유명한 축구스타가 등장하셨다. 그는 내 꿈속에서 자신의 친부를 찾겠다는 소동을 벌였고, 그 후보는 무려 28명이나 되었다.
나는 한때 그를 열렬히 좋아했다. 신기한 것은 내가 임신 사실을 알게 되고 난 후부터 갑자기 그에 꽂혔다. 말 그대로. 그래서 그 시즌 동안 한 경기도 빠짐없이 그의 경기를 보았다. 그리고 시즌 내내 응원했다. 또 신기한 것은 아이를 출산하고 나니 딱히 그가 생각나지 않았다. 그래서 잊고 지냈지만, 워낙 슈퍼스타가 된 탓에 여기저기서 늘 소식을 들을 수밖에 없었다. 화려한 스타가 된 그는 이제 세계적으로 팬을 많이 거느리게 되었던 탓이다. 또 신기한 것은, 그렇게 배속에서 나의 열렬한 지지를 온몸으로 느꼈을 법한 아이는 전혀 축구에 관심도 없을뿐더러, 그 선수에 대한 단 일도 관심이 없다. 정말 약 열 달 동안 이루어진 불꽃같은 애정의 시간이었다.
그가 28명이나 되는 후보자들 중에서 친부를 찾겠다고 소동을 벌인 건, 가만 생각해보니 요새 내가 몰두해 있는 개념인 “정체성(identity)”와 관련이 있는 듯하다.
이에 대해 E.H. 에릭슨은 여러 가지 관점에서 제시하였는데, 그중 "자신이 어떠한 사람인지를 사회 속에서 위치 부여하고 타인과의 관계에서 애매함을 줄이기 위해 이용되는 집합적인 속성을 나타내는 추상적 개념. 집단이 집단으로서 하나가 되는 데 있어서 공통성의 핵을 가리키는 경우도 있다. 초면의 사람일지라도 공통의 집단에 속해 있다는 것을 알면 친근감이 배가 될 정도로 강력한 기능을 갖는다. 자신들의 공통성보다 '우리’와 '동료’를 구별하기 위해 ‘차이’가 강조되는 경우도 있다. 어떠한 아이덴티티를 공유한 사람들은 그것을 매개로 서로 이해하고 이해 관심을 공유하고 있다고 믿고 하나로 행동하려는 경향을 갖는다. 국민이나 민족의 결집을 촉구할 때 중요한 개념이 된다."
[네이버 지식백과] 아이덴티티 [identity] (21세기 정치학 대사전, 정치학대사전편찬위원회) 중 일부 발췌
하지만, 현대사회에서는 에릭슨의 마지막 문장인 국민이나 민족의 결집에 국한되지 않고 다양한 형태로의 결집이 촉구될 때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사용하는 것 같다.
예를 들어, 방탄 소년단을 지지하는 전 세계 ‘아미(army)’ 들은 자신의 가장 큰 정체성을 ‘아미’라 명명 지을 수 있으며, 다른 나라, 다른 지역에 있는 ‘아미’들과 강한 결속력을 보일 수 있다. 이건 지리적, 물리적 거리를 초월하는 ‘집단적 정체성(collective identity)’ 라 칭할 수 있을 것 같다.
인터넷이 발달함에 따라, 사이버 세계에서는 ‘국경선’이라는 물리적인 경계선은 무의미해진 것이다.
또한, 많은 극렬한 스포츠팬들, 리버풀 팬들, 맨시티 팬들, 그들 역시 그들에게 최우선의 정체성이 무엇이냐고 물어보면 어느 팀의 ‘팬(fan)’이라고 당당히 외칠 수도 있을 것 같다.
FC 바르셀로나 한국 팬클럽은 바르셀로나 지역이 속해 있는 카탈루냐 지역의 독립을 지지한다. 그건 바르셀로나 지역의 정치적 결정을 지지하는 것과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물리적 거리로는 전혀 가깝지 않은 이질적인 두 지역에서 같은 정치적 함의에 동질화되는 집단이 존재한다는 것이 약간의 아이러니 같이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더 강력한 결속력을 지닌 ‘정체성’은 ‘종교’ 일 테다. ‘종교’는 물리적 거리, 국가의 소속, 젠더의 구별이 무의미해질 정도로 하나로 결속하는 강력한 ‘아이덴티티’ 일 것이다.
며칠 전, 파리의 어느 한 역사교사 (사뮤엘 빠띠라는 이름을 지닌)는 수업시간에 ‘표현의 자유’를 언급하면서 무함마드를 그린 만화를 보여줬다가 이에 격분한 무슬림 청소년들에게 학교 밖에서 참수당했다. 참수라는 표현보다 ‘beheaded’라는 영어 표현을 들으면 뭔가 그 잔임 함과 끔찍함이 더해지는 것 같다. 그는 결코 무슬림을 비하하려는 의도는 없었다고 수업에 참여한 학생들이 진술하였으며, 혹시나 자신의 논의가 불편하면 교실 밖을 나가도 된다고 덧붙이기까지 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의 전체 진술은 생략된 채로 ‘무함마드 만화를 보여줬다.’라는 단편적인 이야기들로 이슬람 커뮤니티에 퍼졌다. 이건 현대사회에서 흔히 일어나는 일이다. 모든 맥락은 생략되고 사람들이 듣고 싶은 이야기, 믿고 싶은 이야기들로 우리의 사이버 공간을 점령한다. 사람들은 맥락을 살피지 않는다. 그저 짧은 문구의 썸네일에 현혹될 따름이다.
아무튼, 그렇게 사뮤엘 빠띠는 수업시간에 ‘표현의 자유’를 논하다 특정 종교를 믿는 청소년들에게 분노를 사게 되어 머리가 잘렸다. 도대체 17살의 청소년들에게 그토록 끔찍한 일을 할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은 단순히 ‘종교의 힘’일까?
무슬림 리더들은 이 사건을 맹렬히 비난했으며, 보르도 모스크 사원 신자인 타레크 우버루(Tareq Oubrou) 도 “무고한 사람은 죽이는 것은 문명이 아니라, 야만이다.”라고 언급했다.
그릇된 믿음은 그것이 아무리 그들의 견고한 ‘정체성’이라 할지언정, ‘야만’으로 변하는 순간, 그들은 그냥 ‘범죄자’ 일뿐이지, ‘정체성’으로 그들의 행동을 정당화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독일인 친구에게 ‘유럽의 정체성은 기독교 문화와 그리스 신화에 기인한다는데 그 말이 사실이냐?’라고 물어봤다가, 도대체 ‘누가 그런 멍청한 말을 하냐’며 ‘유럽의 정체성은 하나로 정의 내릴 수 없는 다층적인 측면이 많으며, 우리의 장점은 서로의 문화를 존중하기 위해 노력한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물론 그의 말이 모든 유럽인들의 시각을 대변하는 것은 아니지만, 개방성(open-minded)으로 시작한 EU의 정신은 그런 개방성으로 인해 칼을 맞는 신세가 된 건 아닌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문화주의(multi-culturalism)의 포용성을 유지해야 할지 많은 논의들이 오가고 있으며 앞으로도 그 논의의 진통은 지속될 것 같다.
'우리’와 '동료’를 구별하기 위해 ‘차이’가 강조가 되는 정체성이 아닌, 그것을 매개로 서로 이해하고 관심을 공유하고 확장시키는 역할로의 ‘정체성’이 강조되어야 하며, 당연한 이치지만 서로의 다름과 차이를 인정하는데 기여하는 ‘정체성’의 역할이 그 어느 때보다 시급해 보인다. ‘타자’를 배척하는 ‘정체성’이 아닌, ‘타자’를 인정하는 ‘정체성’이 말처럼 쉽지는 않겠지만 그런 방향성을 가지고 점진적으로 나아가야 하지 함이 옳다고 믿는다.
꿈에 나왔던 그 슈퍼스타는 그 이후에 팀을 몇 번 옮겼다. 또 다른 아이러니는 내가 가장 오랫동안 좋아했던 축구선수는 그의 라이벌이다. 그는 한 팀에서 오랫동안 뛰고 있다. 물론 지난 이적시장에서 약간의 잡음이 있긴 했지만. 그 둘을 비교해봤을 때, 전자의 슈퍼스타는 팀을 바꿀 때마다 그의 ‘정체성’이 유동적으로 변했을까? 아니면 후자의 선수는 한 팀에서 오래 뛰고 있기에 그의 ‘정체성’은 굳어져 있는 것일까? 이쯤 되면 어떤 선수들인지 다들 예측이 가능할 거라 믿는다.
마지막으로, ‘표현의 자유’를 논했다가 제자들에게 머리가 잘린 죽음을 당한 사뮤엘 빠띠를 애도하고자 한다. 가뜩이나 ‘표현의 자유’ 나 ‘방역’이냐로 시끄러운 대한민국의 풍경에서 또 다른 의미의 ‘표현의 자유’를 논하다가 ‘종교의 정체성’을 표방하는 10대 들에게 살해당했다는 것은 말 그대로 ‘야만’적인 행위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20년이 아닌 2020년에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