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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통 Dec 08. 2020

무의식의 세계 22

죽음에 대한 감정들 

"세은이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할머니와 함께 했습니다. 바쁜 엄마 아빠 대신 할머니가 대신 엄마 역할을 해주셨던 게죠. 할머니는 노래도 가르쳐주시고, 놀이도 가르쳐주시고, 낮잠도 재워주시고, 젖병에 우유도 타 주시고, 모든 일상생활은 할머니와 함께였습니다. 세은이의 그 작은 세상에서 할머니는 우주였어요. 무엇이든지 함께 하니까요. 

그러다가 세은이도 쑥쑥 자라게 되어서 혼자 할 수 있는 게 많아졌어요. 그리고 학교도 가게 되었죠. 세은이의 세상에 할머니 말고 다른 것들도 하나씩 들어오게 된 것이죠. 세은이는 새로운 세상도 즐거웠어요. 그렇지만, 주말이 되면 세은이는 할머니의 품이 그리워졌어요. 할머니랑 불렀던 노래도 그립고, 할머니랑 했던 놀이들도 그립고, 무엇보다 할머니의 품이 그리웠어요. 그래서 학교에 간 세은이는 주말마다 할머니 집을 찾았어요. 그렇게 어릴 적 전부였던 할머니랑 다시 온 우주가 할머니인 것처럼 즐거운 시간들을 보냈죠. 

그러다 어느 날부터, 세은이는 할머니 집에 갈 수가 없었어요. 무슨 이유 때문인진 모르겠지만 어른들이 할머니 집에 갈 수 없다고 하셨어요. 할머니 집에 가도 할머니를 만날 수 없다 하셨어요. 엄마는 밤마다 남몰래 세수하면서 눈물을 같이 닦아내셨어요. 엄마는 말씀하진 않으셨지만 세은이는 알 수 있었어요. 엄마가 슬퍼한다는 사실을요. 어느 날 엄마가 말씀하셨어요. 할머니가 많이 아프시다고…….

하지만 세은이는 그 말뜻을 이해할 수 없었어요. 물론 어려운 단어는 하나도 없었지만 그게 결국엔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와 닿지는 않았어요. 엄마가 슬퍼하셔서 더 이상 할머니 이야기는 안 하기로 했어요. 엄마도 나에겐 소중한 사람이니깐 요. 그렇게 시간이 흘렀어요. 세은이는 할머니가 보고 싶지만 말을 하진 않았어요. 세은이가 슬퍼하면 엄마도 슬퍼할 테니까요. 그리고 또 시간이 흘렀어요. 드디어 할머니를 보러 가게 되었어요. 하지만 할머니는 예전처럼 세은이랑 노래를 부르실 수도, 놀이를 해주실 수도 없으셨고 할머니 품에서 잘 수도 없었어요. 하지만 할머니는 세은이를 보고 많이 웃어주셨어요. 세은이는 그거면 충분하다 생각했어요. 할머니의 웃음은 세은이를 기쁘게 하니깐 요. 

그리고 어느 날, 병원 장례식장에 가보니 많은 사람들이 있었어요. 사람들은 하나같이 슬픈 표정을 보여줬어요. 그리고 예쁜 우리 할머니의 사진이 걸려있었어요. 할머니 이름도 쓰여 있었어요. 모두가 슬퍼하는데 세은이는 슬프지 않았어요. 눈물도 나지 않았어요. 눈물이 나고 세은이가 슬퍼하면 할머니가 영영 세은이 곁을 떠나갈 것 같았어요. 사람들은 할머니가 천사가 되었을 거라고 했어요. 세은이가 할 수 있는 건 마음속으로 열심히 할머니 생각을 하며 기도하는 것뿐이었어요. 입 밖으로 할머니를 부르면 정말 할머니가 너무 보고 싶을 것 같아서요. 세은이는 할머니가 세은이 마음속에서 자리 잡고 오래 살길 바라고 있어요. 세은이가 할머니를 슬퍼하고 그리워하면 마음속 할머니도 슬퍼할 거 같아요. 


어릴 때, 현지의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셨어요. 현지는 슬펐지만, 눈물이 나지 않았어요. 사람들은 ‘지 아비가 죽어도 눈물 안 흘리는 독한 년’이라고도 했어요. 누군가는 억지로라도 울어야 예의라고 했어요. 그게 왜 예의인지 현지는 몰랐어요. 그리고 사람들은 몰라요. 어느 순간 너무 슬프면 감정이 한순간에 마비가 돼요. 감정이 마비가 되면 눈물도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말이죠. 현지의 엄마는 계속 엉엉 우셨죠. 현지도 사람들이 자꾸 뭐라고 하니 억지로 눈물을 짜내게 되었어요.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데 사실 현지는 믿기지 않았어요. 왜 영화나 책에서 보면 관에서 갑자기 튀어나와서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하잖아요. 현지도 그런 걸 기대했어요. 아버지의 장례식이 5일 동안 이뤄진대요. 사람들은 5일장이라고 불러요. 그래서 현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어요. 최소한 아버지가 관을 박차고 나오길 5일만 기다리면 되니깐 요. 하지만 5일이 지나도 아버지는 관을 박차고 나오질 않았어요. 아버지의 관은 땅 속 깊은 곳까지 묻혔어요. 그때까지도 현지는 아버지가 관을 박차고 나오길 기대했나 봐요. 그때도 거짓 눈물이 흘렀으니까요. 그러나 나중에 알았어요. 현지의 아버지 몸은 부검을 하느냐 온몸이 칼로 도려내지고 찢기고 나중에 다시 꿰매게 된 거라는 사실을요. 그런 몸으로 관을 박차고 나오긴 힘드셨을 거 에요.  그리고 한 달이 지났어요. 어머니는 아버지의 모든 물건들을 불태웠어요. 그래야 좋은 곳에 가신다나 봐요. 좋은 곳이 어느 곳인지 잘 모르겠지만요. 아버지와의 물건들이 잿더미가 된다는 게 슬펐지만, 좋은 곳에 가셔야 한다니 참았어요. 그제야 알게 되었어요. 현지의 아버지는 영영 돌아올 수 없다는 사실을 말이죠. 하지만 눈물을 흘릴 수가 없었어요. 왜냐면 엄마가 더 슬퍼하실 테니 말이죠. 그래서 현지는 아빠와의 추억 대신 아빠와 안 좋았던 기억들을 애써 떠올려 봤어요.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일주일 전에 현지는 아버지한테 혼났어요. 아버지가 친구들이랑 늦게까지 놀다 들어온 거에 대해 현지는 아버지한테 뭐라고 했거든요. 아버지는 현지한테 또 뭐라고 했던 것 같아요. 현지는 잘 기억은 안 났지만, 그런 아버지가 미웠어요. 그래도 아버지는 아버지더라고요. 아무리 미워하려 해도 미워하기 힘들더라고요. 

엄마는 먼저 간 아버지를 원망했어요. 현지는 무엇 하나 할 수가 없었어요. 그냥 가끔씩 아버지 없는 딸이라는 소리를 듣기도 하고, 네가 잘해야 한다고 사람들이 말하는데 뭘 잘하라는 건지도 몰랐어요. 현지는 세은이가 왜 슬픔을 안으로 삼키려 하는지 조금은 알 수 있을 것 같아요.  사람들은 몰라요. 눈물은 아무 때나 나오는 게 아니라는 걸요.  


세은이의 할머니는 어릴 적 세은이의 우주였기에 별이 되셨어요. 세은이는 그래서 별이 좋고 우주가 좋은지도 몰라요. "


어제는 이런 내용의 꿈을 꾸었다. 어릴 적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혼란스러운 사춘기를 보냈다. 

누구도 '죽음'이 무엇인지 가르쳐주는 사람은 없었다.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알려주는 사람도 없었다. 온전히 내가 떠안아야 할 몫이었다. 그러다 시간이 흘러, 성인이 된 후 이런저런 동화책들을 우연히 보다 보니, '죽음'은 슬픈 게 아니라는 걸 어느 동화책을 통해 알게 되었다. 그 동화책은 아이에게 돌아가신 조부모님에 대해 슬퍼하는 아이를 위로하는 내용의 책이었다. 아이는 그 이야기를 통해 슬퍼하지 않게 되었고, '죽음' 이 더 넓은 세상이며, 비록 당장은 만날 수 없지만 그 사람을 마음속에 간직하는 순간 영원히 그 사람은 나와 함께 살아간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나는 그 동화책을 읽고, 너무 펑펑 운 나머지 동화책 이름도 까먹었다. 그 이후로 내 마음은 '죽음'에 대해 평온해졌다. 


세은이는 조카이다. 세은이의 할머니는 재작년에 돌아가신 나의 시어머니이시다. 세은이는 눈물을 삼켰다. 

세은이가 삼킨 눈물을 이해할 것 같았다 조금이나마. 가끔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어제는 선명하게 이런 감정들이 고스란히 꿈속에서 전달되었다. 나의 어린 시절까지 소환되면서. 그리고 심한 가슴통증을 앓았다. 가슴통증은 공황 탓인지, 정말 너무 슬픈 감정들의 중첩 탓인지, 어젯밤 하도 먹어서 위에 부담이 가서 그런지 알 길이 없지만. 아무튼 그랬다. 


우리나라도 어린이나 유아들에게 '죽음'에 대해 쉬쉬하지 말고 극복할 수 있는 동화나 이야기들이 많아지면 좋겠다. 주변에 죽음 하나 겪지 않는 아이는 없다. 하물며 애완동물들과도 '죽음'의 '이별'을 고하는 순간들이 많지 않은가!  

"몬스터 콜(A monster calls)" - 후안 안토니오 바요나 감독(2017) 

<번외로> 영화 속 주인공 아이의 엄마는 오랜시간 투병을 하고 있다. 아이는 엄마가 어서 빨리 낫기를 바라면서도 한편으로는 이런 생활이 빨리 끝나기를 바라기도 한다. 하지만 아이는 자신이 그런 생각을 조금이라도 했다는 것에 심한 죄책감을 느낀다. '죽음'에 대한 또다른 아이의 감정을 느끼게 해줬던 작품.  "엄청 힘들어질 거야"(You will get tough) 라는 말이 때론 더 큰 위로가 될 수 있고 감정의 정직함 속에 평온을 되찾게 해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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