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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변희영 Sep 18. 2021

<병상일기4>


힘든 일을 겪으면 가족의 소중함을 아는 법이다. 가족 구성원이 유달리 착해서 라거나 다정다감해서가 아니다. 견고하게 얽힌, 일테면 거미줄처럼 겹겹으로 연결된 서로 서로가, 불가분의 관계에 놓였기 때문이다. 구성원 누구에게도 이득이 되지 않는다면, 사실 가족의 소중함 같은 건 느끼기 어렵다. 어찌보면 가족이란, 가장 ‘실용적인’ 목적으로 각자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해야 유지되는 관계일지도 모른다. 그러니 실용적 관계가 무너진다면 가족의 견고한 틀에도 금이 간다. ‘핏줄은 속일 수 없다’거나,  ‘피는 물보다 강하다’는 말은, 궁극적으로 끈끈한 가족애를 강화해서 좀더 실용적인 인간사를 만들고자 하는, 어떤 의뭉한 목적을 지녔던 건 아니었을까, 생각도 해본다. 감정과 관념과 추상을 매개로한 정의는,일견 터무니없지만 때로 어떤 무엇보다 강고하다.


병원에 입원한 후로 내 가족, 그러니까 남편과 아이의 애씀과 고생은 눈 뜨고 보기 힘들 지경이었다. 아이는 거의 매일 왔다. 아이같은 엄마가 불안해서라고, 아이는 말했다. 알바며 학원을 오가야하고, 이제 두 달 된 강아지를 ‘독박유견’하고 있으니, 병원을 오가는 일이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도 내가 주문한 물품들을 바리바리 챙겨들고 아이는 왔다. 눈꺼풀이 반은 덮여서 연신 하품을 뿜어내며, 엄만 왜 이렇게 강하게 살질 못해? 타박하면서 매일을 오갔다.

남편은 꼬라지가 더욱 가관이었다. 얼굴이 까맣게 죽어서는 병실에 있는 나보다 더 환자같은 몰골로 영혼 없이 오갔다. 병실에선 하는 일도 별 거 없고 나보다 더 맛이 가선 마냥 누워 있는 남편에겐 배신감도 들었지만, 시키는 건 다 해오고 그럭저럭 말도 잘 듣고 하니 용서하지고 마음을 다잡았다.


그러고나니 불현듯 울컥했다. 이들과 함께 했던 짧지 않았던 시간들이 움켜쥔 모래알보다 잽싸게 흩어져버렸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각자의 위치에서 열심히 살았으므로 그런대로 가족의 실용적 가치는 이뤄낸 셈이었다. 이젠 조금은 제법 행복해져도 될 것 같았다. 은근한 애정이나 푸근한 안정감 같은 것 말고 적극적이고 전투적인 행복을 찾고 싶었다. 미래 따윈 걱정 말고 늘상은 아니어도 간헐적이지만 격정적인 행복. 아, 행복해! 외칠 수 있는, 돈 따위 아끼지 말고 시간 따위 얽매이지 말고 무작정 덤벼서 찾아내는 행복, 사랑에 막 빠져드는 그런 순간의 떨림으로 포효하듯 빠져드는 행복을, 이젠 누려도 될 것 같았던 것이다.


* 아팠다. 몸살로 하루를 앓았다. 사고의 충격으로 부대꼈던 몸과 마음이 이제야 밖으로 분출되는 듯했다. 그러고보면 속일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다. 몸도 맘도 기어코는 제 속을 뒤집어 날 것을 드러낸다. 나는 씩씩했던 가면을 잠시 내려두었다.


그러나 산다는 건 참으로 다채로워서 나는 또 다시 페르소나를 겹겹이 두르고 살아갈 것이다. 가끔 벗겨진 가면에 낙담하면서 혹은 짐짓 모른 체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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