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여울
흔히 글쓰기 책에
시그니처처럼 등장하는
빨간색 원고지 문양.
글자 수 계산 편하라고
일정한 규격을 갖춘 이 모양이
책 표지나 목차에 찍혀있으면
집어 들지 않고는 못 배긴다.
초등학교 5학년 때였나.
지금은 사라진 반공 글짓기 숙제에
어찌할 바를 몰라 엄마께 물었더니,
엄마가 왜 5살 어린 나이에
엄마의 엄마를 잃고
엄마에 대한 기억이 흐릿한지,
그 후 엄마의 아빠는 왜 또 그렇게
괴로워하시다 일찍 돌아가셨는지를
그제야 털어놓으시고
눈물을 쏟으셨다.
외가의 슬픈 가족사를 알게 된
어린날의 나는,
그 당시 15매 기준 원고지 한 묶음만큼의 분량을
꽉 채우고도 모자라
하얀 뒷장에 격자 문양을 자로 그어놓고
그 당시 충격과 슬픔을 폭풍처럼 쏟아냈다.
일주일 뒤 담임 선생님께서 내 이름을 부르셨고,
나는 칠판 앞으로 뚜벅뚜벅 걸어 나가
전교 어린이 대상 반공 글짓기 대회 최우수상을 받았다.
선생님이 말씀하시길,
내가 대상이 아닌 최우수상인 이유는
너무 많이 써서란다.
기대하지 않던 수상 덕인지
어린 딸 앞에서 애써 감정을 추스르려 애쓰던
엄마의 얼굴이 잊히지 않아선지
그 후 원고지만 보면
한참을 쳐다보고 있거나
손바닥으로 가만가만 쓸어보게 된다.
가끔 동네 문방구에서
그다지 친절하지 않은 주인장의 눈총을 받으며
어느 구석 먼지가 가득 쌓인 원고지를,
결국 쓰지도 않을 거면서
몇 개씩 사서 쟁여두기도 하고.
제목에 원고지 규격이 새겨진,
그래서 읽기 시작한
정여울 작가의 끝까지 쓰는 용기는
지금까지와는 조금은 다른 스타일의 글을
써보고자 하던 나에게 사근사근 조언한다.
인풋이 달라지면 자연스레
아웃풋이 달라질 거라는 진리를
새삼스레 일깨운다.
아울러 원고지에 대해 막연히 느꼈던
가슴 먹먹함의 원인도
이렇게 끄적대다가 글을 쓰면서 알아냈다.
더불어 잊었던 옛 기억도 소환했고.
3분의 1쯤 읽고 있는데
저자의 이야기를 자분자분 따라가다 보면
내 안의 여러 물음표와 말줄임표가
적지 않은 느낌표와 마침표를 만날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