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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기만 안 하면 실패는 아니다

part 1.        진작 알았다면 더 좋았을 말들

 ‘용두사미.’     


처음에는 의욕에 넘쳐서 이것저것 시도하고, 이곳저곳 등록한다며 수선을 떨다가 얼마 못 가 제풀에 지치는 나를 두고 엄마가 던진 뼈 있는 말씀이었다. 시작은 용의 머리처럼 창대하나 끝은 뱀의 꼬리처럼 미약했던, 아니 끝이랄 것도 없이 흐지부지되었던 패턴을 이처럼 꼭 집어 적확하게 표현한 단어가 또 어디 있을까.  

   

그러다 ‘지속하는 힘의 위대함’을 알게 되었다. 학교에서는 모범생축에 들었지만 사회생활은 아무것도 몰라 힘들었던 시기, 회사 고과로 평가되지 않는 운동을 통해서였다. 꾸준한 자기 관리는 계기가 주요했는데, 회사가 위치를 옮기면서 새 건물 지하 1층에 사내 피트니스센터가 생겼다. 반가운 마음에 등록하고, 러닝머신에서 살살 걷기부터 가볍게 시작했다. 상대적으로 저렴한 비용에, 굳이 건물 밖을 나가지 않아도 엘리베이터만 타면 도착하는 편리한 입지가 한몫했다. 귀찮다며 망설일 여지가 없어졌다. 비록 약한 강도일지라도 꾸준히 할 수 있는 동력이 생겼다. 따져보니 올해로 16년째다. 아마 퇴사하기 전까지 계속 출근 도장을 찍을 것 같다.


논문 쓰기도 단기간의 성과에 연연하기보다는 장기간의 꾸준함이 필요한 것임을 일깨워주었다. 퇴근 후에 주경야독으로 다녔던 언론대학원에는 각계각층의 다양한 직업을 가진 직장인들이 모여 있었다. 그중에서도 항상 최고의 성적으로 내로라하는 대학, 가장 점수가 높아야 들어갈 수 있는 학부 전공이었던 한 대학원 동기는 논문도 최고로 쓰고 싶어 했다. 하지만 논문 작성은 기존의 해오던 공부와는 결이 달라서 생각처럼 쉽지 않았던 모양이다. 자신만만했던 그 언니는 처음 겪는 당황스러운 상황에 논문 쓰기를 포기하며 석사과정은 수료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그에 반해 “방송인들은 말은 잘하는데, 글은 말 같지 않네요.”라는 지도교수님의 은근한 지청구를 들으면서도 부단히 키보드를 두들긴 나는 석사를 마치고 박사논문까지 썼다. ‘역작은 무슨, 논문은 통과하는 데 의의가 있는 거지. 일단 시작해보자.’라며 논문의 기본인 목차나 뼈대 세우기도 제대로 하지 않은 채 주제만 정해 놓고는 무조건 참고문헌을 읽는 족족 눈사람처럼 글을 갖다 붙였다. 살만 찌워 비대해진 글들은 방향 없이 둔탁하게 굴러다니다가 가지치기를 해가며 겨우겨우 틀을 잡아나갔다. 처음에는 참고문헌을 이어 붙이기만 했지, 출처를 제대로 적어 놓지 않아서 나중에는 시원찮은 기억을 더듬어 수많은 도서와 논문, 리포트와 학회지, 외국 문헌 등을 일일이 다시 뒤지며 쪽수까지 기재하느라 애를 먹었다.      


결국 이탈리아의 세계적 기호학자이자 철학자인 움베르토 에코가 <논문 잘 쓰는 방법>에서 일러준 주제 선정-자료조사-작업계획 수립-원고 쓰기의 제 순서대로 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시간을 잡아먹었다. 지금 생각하면 무모하기 짝이 없는 방법이었지만 그래도 일단 겁 없이 시작하니 평작이든 졸작이든 완성할 수 있었다.      


하긴 지금 쓰고 있는 글을 포함해 그동안 출간한 책들도 하루에 A4용지 한 장씩 120일간, 완성도보다는 기한 준수, 질보다는 양이라며 진득하게 쓴  과정의 산물이다. 희대의 예술작품이 수없이 많은 습작을 품고 있듯, 유레카 아이디어 뒤에는 무수한 아이스 브레이킹 조각들이 있듯, 일단 쓰기나 하자고 했더니 어느덧 어설픈 끝을 보았다. 옳은 판 단을 너무 늦게 하는 것보다 서투른 결정이라도 빠르게 진행하며 그때그때 수정하는 게 낫다는 비즈니스 세계의 명언을 글짓기에 응용하여 덜컥 쓰기부터 했다. 물론 이후에 인쇄 넘기기 직전까지 수차례 교정이 필요하긴 했지만 그러면서 깨닫게 된 한 가지가 있다. 최고이기는 힘들어도, 최선은 어려울지라도, 중간에 관두지만 않으면 어떻게든 되기는 되더라는, 끝은 볼 수 있더라는 사실이었다.     


“두산 야구의 어떤 점이 좋아요?”    

 

<나의 미러클 두산>에서 야구 전문 기자이기도 한 저자는 두산 팬들에게 대체 두산 야구의 어떤 점이 좋은지 물어보았다. 마치 그 질문을 기다렸다는 듯 두산의 한 열혈 팬은 한 치의 망설임 없이 이렇게 대답했다.      


“지고 있어도 최선을 다해요.

선수들이 포기하지 않으니까 응원할 맛이 나요.

희망을 잃지 않고 뛰고 달리다 보면 

정말 기적처럼 역전승하는 일이 생기니까요.”  

   

나의 미러클 두산, 김식 지음, 북오션, 93쪽  

  


 

나는 야구를 잘 모른다. 규칙 정도는 알고 있지만 응원하는 팀도 딱히 없다. 지금은 돌아가신 아버지와 코리안 시리즈에 구경 한번 갔더니 응원 분위기가 신나고 재미있더라는 추억만 있을 뿐이다. 등산 배낭에 싸 들고 간 반건조 오징어가 참으로 맛있었다는 기억과 더불어.    

 

비록 야구에 대해 잘 알지 못하고 딱히 응원하는 팀도 없지만 가끔 야구 경기를 보면 지고 있어도, 이길 희망이 없어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팀에게 끝날 때까지 응원을 멈추지 않게 된다. 기적처럼 역전하면 환희는 두 배가 되고, 설사 진다고 하더라도 승패에 상관없이 멋진 승부에 아낌없는 박수를 보낸다. 희망을 놓지 않고 고군분투하다 보면, 행여 나에게도 가슴 뿌듯한 일이 생기지 않을까 기대하며 말이다.   

   

‘시간에게만 지지 않는다면 그것만큼 쉽게 원하는 걸 갖게 해주는 것도 없다’는 영화 <줄 앤 짐>의 대사도 있지 않은가. 인디언들이 기우제를 지내서 비가 오는 게 아니라 비가 올 때까지 기우제를 지내서 마침내 비를 만난다는 우스갯소리도 있지 않은가. 부침 많은 주식시장에서 주식 초보가 기댈 건 오직 시간뿐이라는 말도 빼놓을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용두사미가 결자해지가 된 건 순전히 시간과 그 시간에 대한 믿음이 가장 든든한 아군이라는 한 줄기 희망 덕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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