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t 1. 진작 알았으면 더 좋았을 말들
<혹시 이 세상이 손바닥만 한 스노볼은 아닐까>라는 책을 읽다가 감탄할 수 있는 것도 재능이라는 말에 적잖은 용기를 얻었다. 침팬지와 우리는 겨우 유전적으로 1.3% 정도 다를 뿐인데 온갖 문명의 이기를 누리는 가장 큰 이유가 바로 감탄할 수 있는 능력 때문이라고 한다.
신체의 일부처럼 누구나 태어날 때부터 재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순간, 우리는 타인의 재능에 질투하지 않고 순수하게 감탄하게 된다. 타인의 재능을 질투하면서 나의 재능이 얼마나 대단한지 미처 깨닫지 못하는 경우는 얼마나 많은가.
혹시 이 세상이 손바닥만 한 스노볼은 아닐까, 조미정 지음, 웨일북스, 208쪽
우린 어렸을 때 얼마나 사소한 일에도 감탄을 금치 못했는지 떠올려본다. 완두콩이 또르르 굴러가는 것만 봐도 어깨를 들썩이며 까르르 웃던 여고 시절도 있었다. 보잘것없는 일에도 기뻐하고 놀라워했던, 참 많이 즐거워하고 원 없이 웃었던, 우리는 모두 알고 보면 재간둥이들이었다.
어른이 되어서도 경이로움에서 비롯된 탄성은 한동안 이어졌다. 내 아이가 “엄마.”하고 그 작은 입술로 말문을 터뜨렸을 때, 처음으로 뒤집고 앉으며 소파를 붙잡고 섰을 때, 수백 번 넘어지기를 반복하다 마침내 제 발로 서서 내게로 아장아장 걸어올 때, 숟가락으로 손수 밥을 떠서 흘리지 않고 제 입으로 가져갈 때, 부러뜨릴 듯 그러잡은 연필로 삐뚤빼뚤 ‘엄마, 사랑해요.’를 썼을 때...
어깨에서 팔꿈치만큼으로 태어난 갓난아이가 심장 높이까지 올라선 지금, 아쉽게도 이제는 더 이상 감탄할 일이 없다는 사실이 한탄스럽다. 사전을 찾아보니 ‘감탄’은 마음속 깊이 느끼어 탄복한다는 의미라고 한다. 그 ‘감탄’을 거리낌 없이 할 수 있는 것도 재능이라면, 마음껏 표현하며 감상하는 ‘감탄과 엇비슷한 감정과 느낌들’ 모두 다 재능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음악을 들으며 공중에 흘러 다니는 음표를 상상할 수 있는 재능, 멋진 풍경을 무심히 지나치지 않고 오래도록 바라볼 수 있는 재능, 다른 사람의 아픈 마음을 누구보다 예민하게 알아챌 수 있는 재능, 새벽의 적막 속 낮에는 미처 몰랐던 작은 소리에 귀 기울일 수 있는 재능...
우리의 재능이 생각보다 많아질 수 있겠다 싶다. 게다가 누구나 잠재력을 가지고 있으니 재능을 기꺼이 꺼내 키울 수 있다. 굳이 잘하는 것과 좋아하는 것 구분해 양자택일할 필요도 없이, 많으면 많을수록, 다양하면 다양할수록 좋은 재능이다. 감탄할 수 있는 것도 재능이라는 말에, ‘캬아, 정말 용기를 주는 멋진 말인걸!’이라고 미간을 부여잡으며 감탄하는 재능이 절로 발현된다.
그렇지 여기까지는 분위기 좋았는데, 덕분에 가라앉았던 자신감이 고개를 들었는데, 한발 더 나아가 창의력 없는 것도 재능이 될 수 있다면 너무 억지일까? ‘이게 무슨 말이야 대체?’라도 의아해하기 전에 나의 사례를 한번 들어보기를 바란다.
나는 원래 남 시키는 대로 말 잘 들어, 그대로 밑줄 치고 외워서 사지선다형 문제를 잘 찍는 전형적인 20세기 사람이었다. 그래서 요즘 자주 회자되는 ‘혁신’이 부족하고 ‘변화’를 두려워하며 ‘창의성’도 없나 보다 낙담했는데, 최근에 몰랐던 내 능력 하나를 발견했으니, 그래서 앞선 주장의 근거로 내세울 구실을 마련했으니 바로 장난감 블록 조립이었다.
아이 성화에 못 이겨 사 모으기 시작한 레고 블록을 처음에는 어찌할 바를 몰라서 가장 쉬운 단계의 것도 조립이 취미라는 회사 후배에게 부탁하기도 했다. 그러던 것이 설명서를 눈이 빠지게 자세히 들여다보고 하라는 대로 그대로 따라 했더니 정말 박스에 그려진 그림처럼 멋진 완성품이 나오기 시작했다. TV 광고 같은 그대로의 결과물이 나오는 게 신기해서 거실의 조명은 있는 대로 다 켠 채 뻑뻑해진 눈을 비벼가며 며칠을 끙끙대기도 했다. 그러면서 마침내 탄생한 레고 작품을 집 안에 전시할 때면 마치 큰일을 완수한 듯 뿌듯했다. 어릴 때부터 아무 생각 없이 하라는 대로 해서 일하면서 문제 제기할 엄두도 못 내고 사내 회의에서는 마땅한 아이디어도 못 내며 이 모양인가 싶었는데 고분고분, 자분자분한 것도 재능이 될 수 있겠다 싶었다.
그런데 막상 사달라고, 나 이거 할 수 있다고 눈물까지 흘리며 졸라댄 아이는 막상 상자를 개봉하고 몇 개 조각을 맞추더니 급격히 흥미를 잃었다. 아이는 자유로운 영혼의 21세기 사람인지라 설명서 그대로 하나하나 순서를 진행하는 과정을 재미없어했다. 박스 겉면에 그려진 화려한 완성품을 보며 직관적으로 맞춰 나갔다. 하지만 한 칸이라도 ‘내 멋대로’ 면 결국엔 원하는 그 모습이 나오지 않았다. 잘못 연결된 부위를 몽땅 떼 내고, 모양이 설명서 그대로였던 애초의 단계로 번번이 되돌아가야 하는 건 엄마인 나의 몫이었다.
제멋대로 갖다 붙인 아이 때문에 시간을 지체하고 중간중간 불필요한 개보수까지 떠맡게 된 나는 아이에게 제멋대로 하지 말고 설명서가 시키는 대로 하라며 짜증을 내기도 했다. 소근육 발달과 성취감 향상을 위한 놀이도구를 앞에 두고 그 취지에 걸맞지 않게 큰소리를 낸 것이다.
그러다가 문득 ‘이게 뭐라고 내가 이토록 흥분하고 있지?’라는 자각이 왔다. 모양이 조금 틀어지고 어설프더라도 중간 과정을 즐기며 아이와 좋은 시간을 보내면 그뿐인 것을. 장난감 조립에서까지 완벽과 완성을 추구하며 조바심 내는 내 모습이 너무 팍팍하게 느껴졌다. 구부정한 자세로 수많은 블록 조각들 속에서 새끼손톱보다도 작은 조각들을 일일이 찾아내는 것도 상당히 피곤한 일이었다.
결국 적지 않은 비용을 치르고 산 레고 블록들은 마땅히 갖추어야 할 제 모습 대신 아이가 그때그때 마음 가고 손 가는 대로 자유롭고 새로운 모양으로 재탄생했다. 엄마인 내가 설명서가 시키는 그대로 하는 재능이 있다면 아이는 기존의 방식을 따르지 않는 대신, 비틀고 응용하며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재능이 있었던 것이다.
비록 제 자리를 찾지 못한 채 박스에 담겨있는 수많은 조각들이 조금 아깝기는 하지만 기존에는 몰랐던 ‘블록 조립’이라는 약소한 재능을 하나 발굴한 것으로 만족이다. 매뉴얼의 말을 잘 듣는 것이 이럴 때는 쓸모가 있고 심지어 재능이 될 수 있다고 우겨볼 수 있으니 다행이다. 더불어 아이의 엉뚱함도 재능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니 마음에 여유가 생긴다. 학교에서 선생님이 말씀하실 때마다 소위 ‘멍 때리기’ 하는 바람에 혼나기 일쑤인 것까지도 말이다. 몇 년 전에 ‘멍 때리기’ 대회가 실제로 열렸듯이 100% 순수하게 멍한 상태로 있는 것도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니까.
자식에게 콩깍지가 씐 부모는 아이가 조금만 뭘 잘해도 천재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내가 나에게 그런 부모가 될 수는 없을까. 온종일 누워서 발가락만 꼼지락거린 날이 있다고 하더라도 자괴감 느끼지 않고, “넌 발가락을 정말 예쁘게 꼼지락거리는 재능이 있어.” 하면서 칭찬해 줄 수는 없을까.
그러고 보니 감탄을 잘하는 것도 재능이고, 창의성 없이 설명서가 시키는 그대로 하는 것도 재능이고, 엉뚱한 것도 재능이고, ‘멍 때리는 것’도 재능이라면, 세상에 재능 없는 이는 한 사람도 없다. 심지어 발가락을 예쁘게 하루 종일 꼼지락거리는 것도 재능이다. 그러니 재능이 없어서 꿈이 없다고, 잘하는 게 없어서 꿈을 못 찾겠다고 걱정하지 마시기를. 누구나 재능 한가지쯤은 꼭 가지고 있으니 마음의 눈을 환하게 밝히고 소풍 가서 보물찾기 하듯 즐겁게 캐내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