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그저 그 마음이면 족하다

part 1. 진작 알았다면 더 좋았을 말들

   

아이와 서점에 가서 읽고 싶은 책을 잔뜩 사 왔다. 너무 많이 구입했는지 밀짚 색깔의 보냉 백도 사은품으로 받았다. 종이 백이 터질까 봐 밑 부분을 두 손으로 받치고 엘리베이터를 타자마자 허리 높이의 손잡이 위에 걸쳐 놓았다. 발밑에 놓으면 다시 어-영-차 들기가 버거워서였고, 아차 하는 순간 엘리베이터 문이 닫힐까 봐 나름대로 꾀를 낸 것이었다.     


그러자 간발의 차로 먼저 탄 할머니께서 당신이 내릴 층수를 누르고는 나에게 몇 층에 갈 건지 물어보셨다.


 "아, 고맙습니다. 00층이요."      


엘리베이터는 곧바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할머니는 나와 아이가 멈춰 설 층수의 버튼을 쉽게 찾지 못하셨다. 평소 자주 누르던 익숙한 위치가 아닌 데다가 눈도 어두우신 것 같았다. 빨간색 디지털 숫자는 할머니가 내릴 층수를 향해 차근차근 올라가고 있었다. 이러다가는 우리 집에 닿지도 못하고 다시 승강기가 내려가 버릴 것만 같았다. 무거운 책들을 난간에 올려놓느라 모로 서 있던 나는 곁눈으로 그 상황을 확인하고는 아이에게 얼른 말했다.    

 

"우리 집 층수 좀 눌러줘."      


아이는 기다렸다는 듯 재빠르게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땡" 소리와 함께 14층에서 문이 열렸다. 할머니는 내리시며 고개를 우리 쪽으로 돌렸고, 우리는 "안녕히 가세요!" 합창을 했다. 할머니도 "응, 그래, 잘 가라."라며 아이에게 인사를 건넸다.     


문을 닫은 엘리베이터는 우리 집을 향해 다시 올랐다. 책 보따리가 무거웠지만 아이의 재빠른 대처 덕분에 우리 모자는 무사히(?)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며칠 전 마트에 갔다가 2주 치를 한꺼번에 사는 바람에 바리바리 먼저 실은 짐들과 아이만 엘리베이터에 탄 채로 문이 닫히는 사건이 있었다. 층수를 미리 눌러놓은 아이 아빠와 그걸 몰랐던 내가 허둥지둥거리다가 벌인 참사였다. 옆 엘리베이터를 급하게 잡아타고 아이의 엘리베이터를 추격하는 동안 아이는 온 아파트가 떠나가게 울음을 터뜨렸고, 오히려 그 덕분에 아이의 위치를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잠시지만 혼자 남겨졌던 기억이 생생했던 아이는 행여 지난번처럼 엘리베이터에 홀로 타게 될까 봐 나에게 꼭 붙어 있다가 현관문 앞에 도착하자마자 "휴."하고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며칠 후 새벽 출근길에 어느 노부부와 내려가는 엘리베이터에 동승했다. 그 일이 있어서 그랬는지 그분들이 층수를 누르는 모습에 평소와는 다르게 눈길이 갔다. 먼저 탄 나는 지하 주차장이 있는 층을 눌러놓았는데 그 부부는 로비가 있는 1층 버튼을 찾는 눈치였다. 단단히 차려입은 걸 보니, 같이 새벽 운동을 나가는 길이었나 보다. 매일 드나들며 익숙할 법도 한 1층 버튼의 위치가 그들에게는 마치 처음인 양 몇 초 동안을 더듬거렸다.     

집뿐 아니라 회사 엘리베이터 버튼을 거의 습관적으로 누르기에 눈 감고도 누를 수 있는 경지였던 나에게는 참으로 새삼스러운 순간이었다. 그건 누구에게는 본능처럼 자연스럽고 쉬운 일이 또 어떤 이에게는 여전히 낯설고 익숙지 않은 일일 수 있겠다는 깨달음이었다. 잠시였지만 헤매는 그 부부의 모습은 키오스크 앞에서 멈칫하며 주문을 망설이고 커피전문점 앞에서 QR코드 찍기를 주저하는 내 모양새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그런 어려움을 겪고 있는 시니어 중 한 분이 무거운 짐에 아이까지 동반한 한 아줌마에게 몇 층을 가냐고 물어본 건 어쩌면 자신이 베풀 수 있는 나름의 친절이자 최선의 배려이지 않았을까 싶다. 비록 결과가 따라주지 않거나 실질적으로는 별 도움이 안 되어도 마음만으로도 고마운 순간이다.      


그런가 하면 예기치 않은 도움의 손길에 큰소리로 감사를 표하는 때도 있다. 앞서가다가 힘차게 열어젖힌 뒤 잠시 문을 잡고 기다리고 있는 낯 모르는 이의 ‘매너 손’ 덕분에 온기를 느낀다. 후다닥 뒤따라오는 발자국을 듣고 열림 버튼을 누르고 있거나, 커다랗고 무거운 짐을 실은 분들이 먼저 나갈 수 있게 엘리베이터 안에서 끝까지 열림 버튼을 누르고 있는 누군가의 두 번째 손가락 덕분에 일상이 덜 팍팍하다고 여겨진다.   

  

우리는 자기 경험치 안에서만 타인을 위로할 수 있다. 

각자 경험한 것을 토대로 이해하고 공감하고 위로한다. 

그래서 온전한 이해와 완벽한 공감은 불가능에 가깝다.      

위로하는 일은 언제나 어설프고 서투르다. 

힘들어하는 사람을 위해 막상 할 수 있는 것은 많지 않다. 

어떻게 말해야 할지, 어떻게 대하는 것이 좋을지 살피는 것 정도 할 수 있을까. 

하지만 그것이 위로의 전부이고, 관계의 전부일지도 모른다.  

    

글 쓰는 심리학자 변지영이 건네는 있는 그대로의 위로, 트로이목마, 변지영 지음, 작가의 말 중에서 



    

남에 대한 위로뿐 아니라 배려도 마찬가지 아닐까. 우리는 어쩌면 우리의 능력치 안에서만 타인을 도울 수 있는지도 모르겠다. 남에 대한 배려라는 것도 어설프고 서툴러서 그 사람이 원하는 방향으로 원하는 만큼을 다하기는 어렵다. 때로는 각자의 입장에서 베푼다는 친절이 오해를 부르거나 원성을 사기도 하고, 그래서 양쪽 모두에게 본의 아닌 상처를 입히기도 한다.     

 

그래서 결과는 둘째치고 원래의 그 마음 자체를 먼저 보여주어야 하는 게 아닐까. 비록 원하는 도움을 받지 못했어도, 큰 도움이 되지 않았어도. 마음을 다한 배려심에 작지 않은 힘이 났기에 결코 그 마음이 미미하거나 약소하지 않다. 타인이 나를 위로하려는 마음만으로도 나에게 위로가 되듯, 그저 당신의 그 마음만으로도 내 마음 역시 훈훈해졌으니 단지 그것으로 감사하다.                                                        



                     

이전 03화 감탄할 수 있는 것도 재능이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