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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남은 것 자체가 성공이다

part 1. 진작 알았다면 더 좋았을 말들

   

“사실 제가 최강이라고 생각한 적은 없습니다. 

지금도 고래와 맞붙는다면 솔직히 이길 자신이 없어요.”     

상어의 도전은 앞으로도 계속될 예정이다.     


또 이유가 있어서 멸종했습니다, 마루야마 다카시 지음, 위즈덤하우스, 150쪽   




내 생애 첫 에세이를 낸 후, 어느 인터뷰에서 내 인생 책이 무엇인지에 관한 질문을 받았다. 인정받기 힘든 사회생활, 더 칭찬받기 어려운 가정생활에서 자존감이 무너져 힘들 때 나를 붙들어준 책과 사람에 관한 내용이었고, 그 안에는 인생의 터닝  포인트가 될 만한 책을 찾고 있다는 속내도 들어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 유발 하라리의 호모 사피엔스 같은 유명하고 어려운 책을 읊고 싶었지만 바로 전날 아이와 읽은 도서를 떠올리며 ‘내가 읽고 있는 책이 인생 책’이라고 대답했다. ‘지금 나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책이 바로 이 순간의 인생 책이 아닐까’라는 솔직한 심정이 담겨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당시의 내 인생 책은 ‘또 이유가 있어서 멸종했습니다’라는 인터뷰 형식의 그림 백과사전이었다.      


사실 첫 에세이를 통해 진입장벽이 높아 왠지 고고할 것만 같은 인문학 서적이나 생각하는 갈대들만 읽을 것 같은 철학 서적, 제목은 어디서 들어봤는데 어떻게 생긴지도 모르는 고전을 인생 책 삼으려고 시도했다는 양심선언을 이미 한 바 있다. 아이와 읽는 동화책에도, 옛 선인들의 속담과 격언에도, 때로는 공중화장실 문이나 지하철 스크린 도어에 새긴 글귀에도 반짝이는 통찰이 깃들여있음을 알게 되었다고 고백했기에 내 대답이 그리 억지는 아니었을 거다.     


그도 그럴 것이 존재감이 책의 화두이자 동력이었지만 그만큼의 콤플렉스였기에 바닥에 가라앉았던 자존감이, 최강이 아니라서 살아남았다는 상어의 말을 듣고서는 박차고 올라갈 힘을 얻었기 때문이다.


“저보다 강했던 생물은 모두 멸종했습니다. 몸집이 커서 살아남으려면 무지막지하게 먹어야 했으니, 환경의 변화에 약할 수밖에 없었죠. 굳이 싸워서 이길 필요도 없었어요. 죽지 않으면 그걸로 충분합니다.”  

   

바다의 포식자 상어는 한 번도 최강이라고 생각하거나 일등이기를 바랐던 적이 없단다. 최고에 집착하지 않은 상어의 마음가짐이 바로 고생대의 판피류나 극어류, 중생대의 어룡, 수장룡, 모사사우루스 등의 녀석들을 제치고 현재까지 살아남은 이유다.      


그림 백과사전에는 상어뿐 아니라 제 약점은 과감히 버리고, 남 주기 아까운 매력까지 희생하며 끝끝내 살아남아 마침내 번성한 여러 종들이 소개되어 있었다. 없는 턱 대신 입이 빨판으로 변해서 살아남은 칠성장어, 포식자를 피하기 위해 뇌를 포기하고 다리를 택한 타조, 눈에 의지하지 않아서 생존한 날지 못하는 새 키위, 짧은 수명 덕분에 전체 개체 수를 유지하고 있는 하루살이, 헤엄치기를 단념하고 바위에 몸을 붙여 자유보다 안정을 택한 해초 등등. 상어처럼 그들 역시 언감생심 한 번도 최강이라고 생각하거나 일등이기를 바랐던 적이 없다.      


출판사와의 인터뷰 후에, 책을 읽고 많이 공감했다는 후배 아나운서의 요청으로 감사하게도 유튜브 <스브스 아나운서> 채널을 통해 실시간으로 온라인 북 토크 시간도 가졌다. 구독자들과의 북 토크도, 온라인 라이브 방송도 모두 처음이라 가슴이 설렜다. 책 이야기와 책 선물을 위한 퀴즈가 어우러져 웃고 떠들며 대화가 풍성해졌다.      


그러던 중 책 속 내용이기도 한, 치열한 경쟁사회 속에서 가늘고 길면 오래가는 게 아니라 굵어야 오래간다고, 가늘면 오히려 끊어진다는 나의 말에 같이 진행하던 그 후배가 내 팔짱을 끼며 응수했다.   

   

“아휴, 선배. 어떡해요. 너무 짠하다. 그럼 우리 이렇게 가늘고 긴 사람끼리 찰싹 붙어서 새끼처럼 꼬아요. 굵어지게.”     


전도유망한 후배가 힘을 실어주니 이렇게 믿음직스러울 수가. 이렇게 든든할 수가. 그래, 존재감 살짝 2% 부족한 2등들이 힘 합치고 기 모아 바짝 붙어 연대하면 꽤 단단해지겠지. 혼자 가늘고 길게 열 걸음 내딛기 버겁다면 약간은 어설프고 모자란 사람들끼리 팔짱 끼고 크게 한 걸음 전진하면 되겠지. 비록 걷는 속도는 혼자일 때보다 느릴지라도 그만큼 세상 두려울 것이 없겠지.   

   

그래, 그래. 우리 그렇게 든든하고 따끈하게 해초처럼, 타조처럼, 상어처럼 일단 살아남고 보자.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게 아니라 살아남는 자가 강한 거라는 이야기가 괜히 있는 게 아니니까. 외로운 열 걸음이 힘에 부쳤다면, 어쩐지 위태위태하고 불안했다면, 이제부터는 여러 사람과 손 맞잡고 한걸음 알차고 실하게 떼어보자. 

    

이렇게 한 아나운서의 인생 책 찾기와 생존을 위한 다 함께 더 굵고 더 길게 새끼 꼬기는 앞으로도 계속될 예정이다. 이제까지와는 조금 다른 모습으로 주-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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