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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하지만 부드럽게

part 2. 그때 하지 않았다면 다행이었을 말들

유치원생에게 대답하기 가장 어려운 질문이 하나 있었다.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     


그것도 엄마와 아빠가 동시에 쳐다보고 있는 상황에서 유치원 원장님이 인생 최대의 난제를 던지셨다. 즉문에 즉답이 필요했다. 어렸을 때부터 다소 고지식한 성격이었던지라 어른이 물으면 반드시 답을 내놓아야 한다고 믿었다. 사실은 엄마가 더 좋았지만 대답을 들을 아빠가 서운해하실 것 같았다.      


“아빠... 요...”     


두고두고 엄마에게 미안해하고 있었는데, 정작 70대의 엄마는 그때의 기억이 전혀 없으셨다. 이럴 줄 알았다면 40여 년 묵혀둔 마음의 짐이라도 덜게 진작 여쭤볼 걸 그랬다.


“00이 예뻐, 내가 예뻐?”     


장난기가 발동한 내가 유튜브로 장난감 리뷰 방송을 시청하던 7살 아들에게 물었다. 00은 사슴 같은 눈망울에 버드나무처럼 늘씬해서 아이들에게 인기가 많은 진행자다. 자칫 엄마의 분노를 살 수 있는 돌발 질문에 아이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둘 다.”     


헉, 녀석은 자기가 태어나기도 훨씬 전 축구선수 데이비드 베컴이 어눌하지만 정감 있게 내뱉은 추억의 광고 대사, “난 듈 다.”를 알 리가 없을 텐데...    

 

“아니, 누가 더 예쁘냐고?”     


재차 물었다. 결국 나도 그 유치원 원장님과 별 다를 바 없었다. 장난 삼아 일부러 무서운 표정을 짓고 괴물 같은 목소리를 흉내 내며 얼굴을 바싹 들이댔다. 아이는 그런 모습이 우스웠는지 까르르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히히, 둘 다라니까.”     


처음엔 놀라웠고, 곧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그 시절의 나는 왜 그렇게 대답하지 못했을까 싶었기 때문이다. 왜 망설이고 왜 눈치 보고 왜 그리 센스는 없었는지. 아니 어린 나에게 그런 것까지는 기대할 수 없더라도 그냥 차라리 솔직하기라도 했으면 어땠을까. 최소한 두고두고 엄마에게 미안했던 마음이라도 감할 수 있지 않았을까.     


다행히 아이는 우문현답의 ‘감’을 비교적 빨리 체득했다. 너무나 곤란했던 기억 때문에, ‘나는 절대로 그런 질문을 하지 말아야지.’ 결심했던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라는 물음을 기꺼이 대신해주시는 몇몇 어른들에게도 아이는 재빨리 “둘 다요.”를 외치곤 했다.     


돌이켜보면 일찍이 고지식했던 나는 사소한 지점에서 오류를 일으킨 적이 꽤 있었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비밀보장’, ‘알리지 않을 테니’ 등의 말과 관련된 것이었다. 

    

“선생님만 알고 있고 비밀로 할 테니 친구들의 장, 단점에 대해서 생각나는 대로 적어보자.”    

 

선생님만 보실 것이라 철석같이 믿었던 중학교 1학년생은 최대한 객관적인 시점에서, 보고서 형식으로 자세히 적어 내려갔다.      


시간이 지나 곱게 접어 제출한 쪽지들 중 몇 개는 당초 말씀과는 다르게 반 아이들 보는 데서 다시 펴졌고, 훈훈한 이야기들이 오가며 분위기는 밝아졌다. 하필 내가 쓴 내용이 선생님의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또렷이 읽히기 전까지는.      


‘박 00: 귀엽고 동그란 얼굴이 똘똘하게 생김. 그러나 남자인데도 나보다 키가 작아 음식을 가리지 않았으면 좋겠고, 안경 쓴 눈을 너무 자주 깜빡거림.’     


순간 당사자의 눈 깜빡임은 더 빨라졌고, 나의 얼굴은 누가 봐도 ‘쟤네, 쟤야.’하고 알 수 있을 정도로 빨개져 있었다.      


한 번의 실수가 큰 교훈이 되어야 하는데, 나의 ‘꽉 막힘’은 사회에 나가서도 그칠 줄 몰랐다. 성적표를 받는 대신 고과를 받는 회사생활이 아직은 익숙지 않던 초년병 시절, ‘비밀이 보장’되니 팀 내 불만을 기탄없이 기입하라는 해당 부서의 주문이 있었다. 지금은 ‘수고가 많으십니다.’로 설렁설렁 메우고 있는 그 공백을 어설픈 정의감에 불타 꽉꽉 채웠다.     


‘임신한 선배 옆자리에 앉아 담배를 피우는 일이 비일비재합니다. 한두 분이 그러는 것도 아닌데 아무도 말을 못 하는 상황입니다. 출산이 얼마 남지 않은 선배를 배려하는 차원에서라도 시정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비행기 뒷자리에 흡연석이 따로 있을 때였고, 누구나 아무렇지 않게 사무실 안에서 담배를 태웠으니 지금처럼 건물 전체가 금연구역으로 지정되기 한참 전에 전 이야기다. 비록 형식적이었을 지라도 팀 내 회의랄 것도 없던 시기에 수직적 조직구조 속에서 내 뜻을 표현할 유일한 방법이었을 수도 있다. 그래도 내가 참 어리석었지, 시정을 위해서는 사실 확인이 우선이고, 그러다 보면 자연스럽게 누가 고발, 아니 문제 제기했는지 알려지는 게 당연한 순서인데. 중학생도 다 아는 걸 나만 몰랐나 보다.     


“너도 피워. 여기 와서 앉아. 같이 태울래?”     


며칠 뒤 되돌아오는 건 빈정거림뿐이었다. 당시 애연가인 몇몇 담당자분들에게만 비아냥을 듣고, 정작 임신한 선배는 그 사실을 모른 채 아이 낳고는 바로 퇴사했다. 뭐라고 시청 조치는 들었는데 또 뭐라고 꾸중하기에는 찔리지만 한편 괘씸한 햇병아리 후배를 그런 식으로밖에 응징하지 못했던 옛 선배들도 자연인이 된 지 이미 오래다. 그런 노력이 지금의 이런 변화를 이끈 작은 씨앗이나 불쏘시개였다고 말할 수도 없는 무려 22년 전쯤 긁어 부스럼이었다.     


우여곡절 직장생활, 25년이 넘어가니 겨우 천지 분간이 가능하게 되었다. 신상도 손쉽게 털리는 마당에 비밀이란 있을 수 없다. 간헐적 회의와 일상 대화를 통해 아쉬운 점을 우선 해결하고 공식적인 절차를 밟는 건의 사항은 최후의 보루로 남겨두었어야 했다. 진심을 담은 부드러운 융통성이 먼저였다. 사람들은 요즈음 그걸 ‘진정한 소통’이라고 부르는 듯하다.      


마흔 살에는 얼굴을 책임져야 한다면, 

쉰 살에는 사용하는 언어를 책임져야 한다.

쉰 살 이전에는 저항하면서 나의 것을 만들어 왔다면, 

쉰 살 이후부터는 정립하면서 발전시켜야 한다. 

쉰 살 이후에도 여전히 비판적으로만 된다면, 

자기 것이 없다는 것을 말해줄 뿐이다.     


너의 화는 당연하다, 박성만 지음, 추수밭, 156쪽     


그나저나 하나뿐인 늦둥이 아들이, 외곬이었지만 드러내 놓고 솔직할 용기도 없어서 늘 마음의 갈등이 많았던 나를 닮지 않아 안심이다. 학창 시절 죽어라 하고 풀던 OX 퀴즈나 사지선다형에서처럼 답은 하나만이 아니라는 걸, 훨씬 더 무궁무진한 선택지가 있다는 걸 이미 아는 것 같다. 앞으로 어른들이라고 불리는 윗사람들이 파놓는 인생의 함정(?)을 잘 피해 갈 수 있을 것 같아 아직까지는 마음이 놓인다.      


그런데 난 왜 진작 그러지 못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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