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년 동안 해오던 스포츠 중계와 11년 동안 해오던 피겨 중계를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놓게 되었다.
두 번의 하계 올림픽과 두 번의 동계 올림픽을 경험한 유일한 홍일점 지상파 중계 아나운서라는 혼자만의 자부심이 있었지만 금녀의 벽을 깨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래도 마지막 순간은 그냥 "그동안 수고하셨습니다. 안녕 바이 바이."하고 곱게 보내주길 바랐는데, 혹시 모를 반발을 예상했던 건지 명분을 확실히 하기 위한 험악한 모니터가 이어졌다고 한다. 내가 원했던 마지막 작별의 그림은 상상으로 그쳤고, 상사의 어색한 통보로 중계 커리어는 그냥 막을 내렸다.
딱히 무엇을 더 기대하거나 거창한 꿈을 꾼 건 아니었다. 시즌 때마다 밤샘 중계가 힘들었지만 선수들의 활약에 같이 손뼉 치고 기뻐하는 일이 즐거웠다. 오랫동안 해 온 일이라 언젠가는 후배들에게 바통을 물려줄 일임을 알고 있었고 나름대로는 자료를 정리해 두기까지 했다. 맨땅에 헤딩하듯 깨지고 부딪히면서 익힌 하나하나를 후임자는 조금이나마 덜 수고롭게 가져가기를 바랐다. 비포장도로를 갈지자로 기었다면 다음 사람은 편한 길로 비교적 순탄하게 걷기를 바랐다. 하지만 인수인계는커녕 쫓겨나듯 아이스쇼 중계를 끝으로 그만두게 되었다.
무언가 허한 마음. 그동안의 내 노력이, 그동안 바친 세월들이 아무런 인정도 받지 못하고 공중에 먼지가 되어 날아가고 흩어져 버리고 사라져 버리는 것 같아 허망한 마음을 견딜 수 없었다. 무척이나 아쉽기도 섭섭하기도 했다. 그리고 공허함은 두 번의 짧은 여행에도 불구하고 채워지지가 않았다.
그때 만난 프로그램이 낭독 팟캐스트 <당신의 서재>였다. 주로 자기 계발, 심리 관련 책들을 읽고 감명 깊었던 부분을 발췌해서 읽어 내려가는 콘셉트였는데, 프로그램이 생기면서 그 핑계로 책을 읽기 시작하고 이내 책 읽기에 빠졌다. 더 자세히 이야기하면, 애초에 라디오본부에서 기획하고 아나운서팀에서 출연을 하는 것이기에 기껏 수고해봤자 남 좋은 일 시키는 것 아니냐는 팀 내의 반대가 있었다. 시작 단계에서 뒤집힐 뻔한 것을 모든 제작과 다른 아나운서들과의 녹음, 자체 낭독까지 떠맡는 조건으로 계속하자고 우겼다. 지금의 텅 빈 마음, 이 프로그램 아니면 안 될 것 같아서, 이거라도 붙잡아야 할 것 같아서였다.
그렇게 우기고 붙들어서 책 읽기를 시작했다. 읽은 책은 마음에 와 닿은 부분을 밑줄 긋고 페이지 한 귀퉁이를 접어 표시해 놓았다가 다음날 스튜디오에서 낭독을 했다. 주말이나 연휴 전날에는 출판사에서 보내준 책 서너 권을 종이봉투에 챙겨 들고 퇴근했다. 점점 읽는 속도가 빨라져 휴일이 끝나갈 즈음에는 가져온 책을 다 읽어버리고는 한두 권 더 가져올 걸 그랬나 입맛을 다셨다.
처음에는 책 협찬받기도 힘들었는데, 전화를 돌리다 보니 점점 여러 출판사에서 책을 보내주기 시작했다. 가까운 지인이나 대학원 선후배가 책을 냈다고 단체 카톡 방에 올리면 적극적으로 책을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면서 알게 된 출판사들이 또 계속해서 책을 보내주며 책은 점점 많아졌고 읽은 책은 쌓이고 쌓여 사무실 책상 위뿐만 아니라 책상 아래쪽도 점령했다. 말 그대로 발 디딜 틈이 없어졌다. 팟캐스트 업로드용 당신의 서재 파일도 내가 읽은 분량이 너무 많아 내가 읽은 책만 하위 파일에 따로 빼놓았다.
낭독에 쓰일 배경음악도 직접 찾았다. 책 내용에 어울리면서 저작권에 저촉되지 않는 클래식을 고르는 것이 행복한 고민이자 숙제였다. 덕분에 생판 모르던 고전음악도 조금씩 찾아보게 되었다.
지금은 '그래, 내가 중계하느라고 정신없었으면 아마 이렇게 책 읽을 시간도 없었을 거야'라고 생각한다.
시렁 위에 매어 있는 포도나무가 너무 높아 몇 번 시도하다 포기하고는 신 포도일 거라 자위하는 이솝우화의 여우 같기도 하다. 하지만 한쪽 문이 닫히면 다른 쪽 문이 열린다는 전화위복의 계기로 삼는 편이 정신 건강에는 더 좋다. 간간이 들려오는 선수들의 수상 소식에 귀를 기울이면서도 아쉬움 없이 홀가분한 걸 보면 분명 억지는 아닌 듯하다. 일이 아무리 좋아도 그 일이 내가 아니고, 회사가 아무리 좋아도 그 회사가 나를 책임 지진 않더라는 사실도 다시금 깨닫게 되었다.
아마 책이 아니었다면 조금 더 방황을 했을 것 같은데 생각보다는 빨리 마음을 다잡을 수 있었다.